<벽을 간질이는 손: 홍이현숙 작품에서 촉각의 활동>

1. 벽 너머의 구멍
홍이현숙의 최근 작품에는 자주 촉각이 등장한다. 등장 방식은 다양하다. 감상자가 직접 촉각을 통해 체험하는 작품도 있고, 작가의 촉각적 경험을 영상에 담은 작품, 나아가 촉각적 경험이 직접 그려지진 않지만, 감상자의 촉각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려는 영상 작품 등도 있다. 홍이현숙이 촉각을 사용하는 방식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바위, 벽, 거대한 부처상 등 인간의 몸보다 훨씬 큰 대상을 손으로 만진다는 점이다. 커다란 대상을 만질 경우, 손바닥만으로는 좀처럼 그 크기를 충분히 가늠할 수 없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것이 두 번째 특징인데, 온몸을 사용해 대상에 접촉하게 된다. 배를 대거나 등을 붙이거나 매달리거나 한다. 홍이현숙의 촉각은 빈번히 전신 운동을 수반한다.
   온몸을 움직여 큰 대상과 가까워지며, 작가는 무엇을 만지려고 하는 것일까. 표면의 질감, 온도, 단단함…물론, 작가의 촉각이 파악하려는 것은 다방면에 걸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건 ‘구멍’에 대한 관심이다. 예를 들어 2022년 개인전에서 있었던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 〈12m 아래, 종(種)들의 스펙터클〉(이하 〈12m 아래〉)을 보면, 작가는 퍼포먼스의 참가자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이 근방에 있는 이런 굴들을 한 번 떠올려본다.
어떤 건물들의 지하 주차장이기도 하고, 지하 벙커이기도 하고
미술관이기도 하다.
이 굴들은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
이 섬들 연결해 볼 수 있을까?

저 벽의 허방을 찾아라
땅속 바위가 말랑말랑해져 스스로 그 구멍을 내줄 때까지.
두드리고, 문지르고, 간질이고, 구르고, 비비며 흔들어라
돌연한 우발성을 찬양하라!
망설임 없이 한몸이 되는 위험과 기쁨!

   〈12m 아래〉는 서울의 지하 12m, 99.99%의 완전한 어둠의 공간에서 진행한 관객 참여 퍼포먼스 〈12m 아래〉 기록 영상이다. 이 캄캄한 지하공간에서, 겁을 먹고 벽을 따라 엉겨 붙어 서 있는 참가자들을 향해, 작가는 지하에 텅 비어있는 다른 ‘구멍’—주차장, 지하 벙커, 미술관 등—을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즉, 자신들이 정돈된 ‘방’이 아니라, 위로 차가 달리거나 빌딩이 서 있는 ‘땅속’에 있다는 감각을 가지게 하고, 나아가 그 땅속을 에멘탈 치즈처럼 몇 개의 구멍이 나 있는 공간으로 상상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2. 촉각적 투명
일반적으로 촉각은, 물질의 ‘표면’을 파악하는 감각이라고 이해되곤 한다. 확실히 손으로 물건을 만짐으로써 우리는 그 자체의 질감이나 모양, 온도와 같은 표면에 관한 정보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촉각이 표면의 ‘안’이나 ‘너머’에 있는 것도 간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팔을 잡으면 피부뿐만 아니라 안쪽에 있는 살, 심지어 살에 묻혀 있는 뼈의 위치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혹은 차를 운전하는 동안 좌석에 앉아 있는 엉덩이를 통해 직접 닿지 않은 도로의 요철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마치 시각이 물을 관통해 그 너머에 있는 물고기를 파악하거나 유리 너머로 풍경을 포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시각에서 물이나 유리가 그 너머에 접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투명한’ 매체인 것처럼, 촉각에서 어떤 종류의 물체는 ‘투명하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벽을 더듬거리며 그 너머에 있는 ‘구멍’에 접근하려는 홍이현숙의 촉각은, 실현되기 어려울지몰라도 분명 우리의 일상적인 촉각 경험의 연장선에 있다. 애로 사항은 벽의 단단함이다. 그래서 작가는 벽을 “치거나, 문지르거나, 간지럽히거나, 흔들거나” 함으로써 이를 부드럽게 하려 한다. 진동이 전해지는 것이야말로 촉각적 투명함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12m 아래〉관객들은 실제로 두 손을 짚고 벽을 밀거나 발로 차거나 온몸으로 벽과 씨름하기 시작한다.
   비슷한 장면은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승가사 마애불〉(2019)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서울 북한산의 사찰 승가사에 있는 높이 5.94미터의 거대한 석조 불상인 ‘마애여래 좌상’을 작가 목소리로 ‘만지는’ 영상 작품이다. 카메라는 불상의 발치부터 손, 팔, 얼굴에 이르기까지 불상의 온몸을 차례로 따라간다. 홍이현숙의 내레이션은 때로 광물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고고학적인 내용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감상자에게 손대는 방법을 지시하는 안무가나 불상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비평가가 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안무가로서 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내레이션으로 손이 닿지 않는 석불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거나 눈 주위를 마사지하고, 귓불을 잡아당기는 장난을 치거나 때로는 관능적인 애무를 하듯 감상자를 이끈다.
   물론 불상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간지럽히거나 마사지하거나 장난을 치고 애무를 한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시에는 촉각을 통해 암석을 ‘부드럽게’ 하려는 의사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뜻은 역시 암석 속에 있는 ‘구멍’, 즉 부처의 영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에서 유래한 듯하다. 석불의 귀에 카메라를 줌인(zoom in)하는 장면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감상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안구를 지나 뇌 속 저쪽 끝까지 가봐요. 부처님 마음의 안쪽으로 헤집어봅니다. 그 알 수 없는 미로를 감촉해 봐요.”

3. 다공성 자아
홍이현숙이 벽이나 바위의 단단함을 부드럽게 하여 투명하게 만들고 그 너머에 있는 ‘구멍’에 접근하려는 촉각을 제시한다면, 이러한 촉각의 의미를 좀 더 밝혀보려 한다. 정치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가 저서 『세속의 시대(A Secular Age)』(2007)에서 개념화한 ‘다공성 자아(porous self)’라는 개념을 참조할 수 있다. 테일러가 이 책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중세 이후 서구 세계에 일어난 세속화의 문제로, 이 역사적 사건 자체는 홍이현숙의 작품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그러나 테일러의 논의는, 근대화된 개인이라는 인간상과 다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효과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다.
   다공성 자아는 ‘경계 지어진 자아(bounded self)’의 반대 개념이다. 경계 지어진 자아는 근대 이후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근대인은 정신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바깥 세계의 관여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기분이 가라앉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의사에게 ‘우울감은 신체적 화학 반응의 결과입니다.’라든가 ‘그것은 호르몬 이상에 불과합니다’라는 등 ‘과학적인’ 설명을 들을 것이다. 이런 설명은 그의 정신이 우울감에서 거리를 둘 수 있게 하여 그 기분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자기 주도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테일러는 경계 지어진 자아란 ‘완충재로 뒤덮인 자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근대적 인간은 자기 주위에 명확한 벽을 쌓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음으로써 자기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계 지어진 자아란 세계로부터 고립된 인간이나 다름없다.
   이에 비해, 다공성 자아는 세계의 여러 힘이 엇갈리는 한복판에 있다. 자신과 세계 사이의 벽에 많은 구멍이 뚫려 있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다양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의미의 원천은 내 안이 아닌 바깥에 존재한다. 가령 감정이란, 정신이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반응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들어온 신이나 만물의 정령에 사로잡힘으로써 생긴다. ‘신’이나 ‘정령’이라고 하면 너무 마술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요컨대, 이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존재와 우호적인 관계로 얽혀 있다는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는 것에 영향을 받으며 그와 함께 변동하는 다공성 자아의 근저에는 세계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감각이 있다. 다공성 자아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대신에 제어할 수 없는 존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궁리를 한다. 
   벽과 바위 같은 경계의 단단함을 부드럽게 만들어, 그곳에 ‘구멍’을 내려는 홍이현숙의 촉각은 글자 그대로 경계 지어진 자아를 벗어 던지고 다공성 자아로 변신하도록 관객을 독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12m 아래〉의 첫머리에서 작가는 관객들에게 상황을 제어하려는 의지를 버리고 우연을 즐기도록 권유하고 있다. 촉각을 사물의 표면에서만 포착한다면 그것은 근대적인 경계 지어진 자아다. 그러나 표면을 통해 표면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느끼고 나와 그것이 서로 관여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세계를 신뢰하고 다공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그건 근대적 주체에게는 조금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럴 때 “어둠이 이끌어 준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동물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호흡, 몸에서 나는 냄새도 마찬가지다. 시각은 확실히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경향이 있다. 시각을 내려놓음으로써 사람들은 조금씩 세상과의 사이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벽을 흔들고, 녹이고, 구멍을 내는 것이다.

4. 기묘한 반전
세계를 신뢰하면서 세계 한가운데에 자신을 두는 다공성 자아라는 존재 양식은 고래, 사자, 고양이, 버드나무 등 다양한 동식물과 ‘콜라보레이션’한 홍이현숙의 작품 세계를 관통한다. 물론 아무리 울음소리를 흉내 내거나 몸의 움직임을 모방한다 해도 이런 비인간 존재를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콜라보레이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작가의 작품에는 어딘가 유머가 묻어난다. 그렇지만 홍이현숙은 이러한 작품을 통해서 우리의 신체 감각을 재편하여, 우리 안에, 평소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존재 양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촉각의 역할을 다시 짚어보자. 자주 지적되듯이 촉각은 쌍방향성을 가진 감각이다. 즉 내가 대상을 만질 때, 나는 대상으로부터 만져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한 의식 지향성의 문제가 아니다. 만지는 일은 상대에 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다. 만지는 사람은 상대방의 반응을 보면서 자신의 촉각 패턴을 매 순간 미세 조정하고 있다. 어떻게 건드리면 상대를 겁주거나 상처 주지 않을 수 있나, 혹은 반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대담하게 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이고, 그 결과 생겨난 나의 행동이 상대방의 반응을 다시 바꿔 간다. 이와 같이 촉각은 상호 간에 서로 마주 보는 거울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촉각적 상호작용은 서로 엇갈리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대를 필사적으로 따라가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타인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라는 자기 자신의 다공성을 깊이 실감한다.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의 영상을 볼 때, 감상자는, 홍이현숙의 내레이션에 따라서, 돌덩어리인 불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만지고, 석불의 반응을 보면서 만지는 방법을 바꾸어, 그 구멍이자 영혼에 닿으려고 한다. 물론 감상자의 촉각도 불상의 반응도 물리적 접촉이 없는 상상적인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기묘한 반전이 일어난다고 느낀다. 내가 대불을 상상적으로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불상이 되고, 내가 나에 의해 만지고 있는 것처럼 느낀 것이다.
   나는 붉은색을 띤 석불의 입술이나, 아름다운 왼손 손가락의 윤곽을 살짝 덧그리며, 덧써진 불상의 몸에 일어날 소스라치는 잔물결 같은 변화를 상상한다. 그리고 석불의 몸서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며 다시 불상을 만지려 한다. 그렇게 서로를 끌어들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대불의 몸이 된 것 같다. 이런 기묘한 반전은 3년 후 영상 작품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월출산시루봉〉(2023)에서도 반복된다. 암벽등반 하는 작가의 손이 천천히 흐르는 시간, 마치 바위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내가 내 몸을 쓰는 것이 반드시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몸이야말로 정신이 만드는 자기방어의 벽을 넘어 그 너머로 도달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대해 자기를 여는 신체의 모험 끝에 그에 걸맞은 존재 양식이 내 안으로 문득 내려온다. 홍이현숙의 작품은 촉각이라는 구체적인 감각을 매개로하여, 나를 멀리까지 데리고 가서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연결해주고 있다.
번역: 한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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