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동 비석마을, 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분 42초
- 작가노트(1)
내가 당신을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당신을 볼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늘 뛰어 다니기 때문이다.
내 머리 위에서 바로,
쿵쾅 쿵쾅 쿵쿵쿵
내 머리 위에서 바로,
쿵쾅 쿵쾅 쿵쿵쿵
멀리 보이는 신작로는 휘황하지만
산 꼭대기의 이 거처는 그보다 더 아늑하다.
멀리서도 나를 깨우는 경쾌한 당신의 발소리
쿵쾅 쿵쾅 쿵쿵쿵
산 꼭대기의 이 거처는 그보다 더 아늑하다.
멀리서도 나를 깨우는 경쾌한 당신의 발소리
쿵쾅 쿵쾅 쿵쿵쿵
내가 땅속에서 더 당신을 잘 본다면
그건 이미 당신이 너무나 환하기에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월남 치마를 펄럭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당신이
수시로 뀌어대는 방귀 때문이다.
밥 태우는 냄새 때문이고 시큼한 수건 냄새 때문이다
맘껏 질러대는 사랑하는 소리 때문이다.
그건 이미 당신이 너무나 환하기에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월남 치마를 펄럭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당신이
수시로 뀌어대는 방귀 때문이다.
밥 태우는 냄새 때문이고 시큼한 수건 냄새 때문이다
맘껏 질러대는 사랑하는 소리 때문이다.
거미줄과 박쥐똥이 더럽게 엉켜붙은 나를 알아본
당신
내가 딩신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차디 찬 돌뿐이었지만
당신은 나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누워
햇살 이불을 덮으며 따스해했다.
당신
내가 딩신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차디 찬 돌뿐이었지만
당신은 나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누워
햇살 이불을 덮으며 따스해했다.
당신은 늘 나를 염두에 두지만
곧잘 잊어먹기도 한다
아, 그러나 나는 당신을 두고 떠날 수 없다.
이 어둠의 의미을 당신처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었든 살았든 당신과 나는 이미 같은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가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곧잘 잊어먹기도 한다
아, 그러나 나는 당신을 두고 떠날 수 없다.
이 어둠의 의미을 당신처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었든 살았든 당신과 나는 이미 같은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가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내 꼭대기위에서 당신이 몸을 던질 때도 나는 있었고
내가 먼 바다로 나갈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끝내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가 먼 바다로 나갈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끝내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으니
고국은 나에게 멀지만
외롭지 않다.
당신이 나의 목마를 타고 있는 이상
난 빈털터리가 아니다.
당신은 나의 존재의 목적이고 훈장이다.
떡 버티고 머리위에서 빛나는
외롭지 않다.
당신이 나의 목마를 타고 있는 이상
난 빈털터리가 아니다.
당신은 나의 존재의 목적이고 훈장이다.
떡 버티고 머리위에서 빛나는
- 작가노트(2)
산복도로변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구한말 일본인 거류민단이 들어오면서 빈민촌이었던 이곳에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들어섰고 해방 이후 한국 전쟁과 피난, 부산시내 판자집 철거정책으로 산으로 산으로 떠밀려온 사람들의 마을이다. 지금도 일본인 공동묘지의 비석 등이 계단, 담장의 부재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비석마을'이란 마을 이름에서 '비석'이 바로 묘비를 뜻한다. 묘비였던 돌을 주워와 다듬이질할 때 썼더니 "이타이, 이타이(아야, 아야)!" 하는 소리가 돌에서 들렸다는 얘기, 유골함이었던 단지를 항아리로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아츠이, 아츠이(뜨거워, 뜨거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거나 안에서 손이 나왔다거나 세탁소 지하에서 밤중에 자는데 게다 소리가 들리더라,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 등등.
산복도로변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구한말 일본인 거류민단이 들어오면서 빈민촌이었던 이곳에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들어섰고 해방 이후 한국 전쟁과 피난, 부산시내 판자집 철거정책으로 산으로 산으로 떠밀려온 사람들의 마을이다. 지금도 일본인 공동묘지의 비석 등이 계단, 담장의 부재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비석마을'이란 마을 이름에서 '비석'이 바로 묘비를 뜻한다. 묘비였던 돌을 주워와 다듬이질할 때 썼더니 "이타이, 이타이(아야, 아야)!" 하는 소리가 돌에서 들렸다는 얘기, 유골함이었던 단지를 항아리로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아츠이, 아츠이(뜨거워, 뜨거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거나 안에서 손이 나왔다거나 세탁소 지하에서 밤중에 자는데 게다 소리가 들리더라,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 등등.
부산의 역사를 좀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네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유족들이 갑작스럽게 조선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무덤을 이장할 겨를이 없었다. 당시 아미동은 미처 수습해 가지 못한 묘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미동은 천마산 기슭으로 바람이 많이 닿는 곳이고, 주거가 가능한 공간도 충분하지 못한 곳이다. 게다가 경사가 급하여 주거 공간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우선은 살고 봐야 했던 피난민들은 묘지 위에다 천막을 치고는 집으로 만들어 정착하여 살았다. 일제 강점기 죽음의 공간이었던 아미동 산19번지는 삶의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정착하여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세대를 구분하는 벽이 만들어지고 판잣집을 짓고 이어 루핑집, 그리고 슬레이트집의 가옥구조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건물 벽, 주춧돌, 골목의 계단, 가스통 받침대 등 곳곳에 쓰인 돌에는 글자와 그림이 있다. 무덤에 쓰는 상석과 비석들이다. 정착민 대부분은 국제시장주변에서 행상을 하거나, 혹은 지게꾼 등의 노동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웃 사람들과 함께 다니며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마련하기도 하면서 삶을 지속해왔다. 세월이 흐른 지금 마을 사람들의 언어나 문화는 부산사람과 섞여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피란 오면서 여기에 터전을 잡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당장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지경이었기에 처음 이곳에 올 때도, 그리고 지금도 무덤이든 비석이든 귀신이든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배고픔과 추위라서 누울 자리를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귀신 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은 사람 위에 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거처를 내어준 데 미안함과 고마움이 들어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비석 앞에 수시로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놓고 영혼을 위로해 주며 명절에도 제사(차례)를 같이 지내준다고 한다. 음력 7월 15일(백중)에는 인근 절에서 단체로 일본인 위령제를 지낸다. 아무리 적국 사람이었다고 해도 살아있는 일본인은 8.15 광복과 함께 모두 쫓겨나 여기 묻힌 사람들은 모두 제사도 끊겨 버린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지배층도 아니고 대부분 서민으로 힘들게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동병상련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살았던 재한 일본인 중에는 부라쿠민 등의 하층민이 생활고를 피해 이주한 경우도 있었고 다우치 치즈코처럼 한국인 빈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해 왔거나 가네코 후미코 및 소다 가이치 등처럼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지주나 경찰, 헌병 등의 지배층으로 온 이들을 제외하면 당대 한국인들이 하층민 출신의 일본인 이주민들을 무작정 적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연출: 홍이현숙
퍼포머: 히로무 사토, 홍이현숙
촬영, 편집: 김형주
드론 촬영: 김이중
B카메라: 성시용
음악: 슌이치로 히사다
자문 및 통역: 하전남
텍스트 번역: 콜린 모엣프로젝트
매니저: 최소연
장소: 부산시 서구 아미동, 박선자님 댁, 오점례님 댁,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쿨피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