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 울프의 대칭적 무의식과 그 모험활극
김남수(안무비평)
김남수(안무비평)
“들쥐와 같은 험준한 지구 등성이를 포복하는 짓은 대체 누가 시작하였는가”(이상, 《LeUrine(오줌)》)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이는 한국의 작가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영토 내부에 삶아지는 형국이 아니라 세계 체제를 터치하고 있음을, 그런데 누가 터치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터치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따위의 간장 종지같은 스타일을 버리고 대범하면서도 스케일이 커야 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하다. 홍이현숙은 놀랍게도 이러한 조건에 응하는데, 그 응하는 방식이 대지와 도시a, 생명과 재생, 경공술과 한가로운 산책을 마구 섞으면서 “예술이 대체 뭐냐?”라는 반문을 던진다. 이미 확립된 지배적이며 공식적인 예술의 판 위에서 카프카의 반쯤 열린 문이라는 역설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냥 무시해버린다. 그 대신 정말 사막과 초원의 대지를 걷고, 그 걸음이 이 악마의 아가리처럼 정체해 있는 도시로 이입될 수 있도록 디졸브한다. 루소는 “도시의 벽들은 시골의 집들을 파괴하면서 생긴 잔해들로 지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라고 충고했지만, 홍이현숙 작가에게 도시는 시골의 반대항이 아니라 저 원초적인 대지의 종속항이다. 대지가 낳은 사생아로서 도시이다. 왜? 대지와 도시의 디졸브는 도시가 대지에 포함되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예술사에 등재되기 전 까지는 비–예술의 강렬함으로만 존속하고,실제 당대의 예술사회에서‘예술됨’ 이란 단지 상호주관적인 임시의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고로 ‘예술됨’보다는 ‘비–예술’ 쪽이 훨씬 더 퍼포머티브(수행적인 것)로서 우리에게 인지적 충격을 가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예술적인 것에서 배제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배제의 논리는 아감벤이 말한 것처럼 ‘예외상태’의 발령인데, ‘비–예술’로 배제된다는 것은 바로 배제된 것의 포함이라는 이상하고 역설적인 상태를 출현시킨다. 고로‘비–예술’은 힘이 세다.그리고 그것은 예술이라는 자명한 체계보다 윗길에서 일종의 태도 문제를 제기한다. 하랄트 제만이 〈태도가 형식이 될 때〉라고 했을 때, ‘형식’은 ‘생성’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자체가 세계를 생성한다는 것으로서 굉장한 박력이 있다. 태도라는 말에는 스탠스나 관점, 제스처, 입장, 신세, 처세 같은 개념들이 마구 들어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개념들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있는가를 담아내고 있다. 이것이 1968년이다. 5월과 혁명 그리고 초현실의 금지. 홍이현숙에게서 이러한 비–예술과 태도로서의 박력이 느껴진다. “들쥐와같은 험준한 지구 등성이를 포복하는 짓”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성한 미소와 더불어 소규모하나마 이동되어가는 실’을 만드는 것도 그러하다. 어떻게 이 중년의 몸의 주름 내부에 잠재적인 것이 문득 깨어나 충동과 무의식으로 무엇인가 인지적 충격의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등장하는 “사람은 많되 몸짓은 적다”에서 바로 그 희소한 몸짓에 해당하는 퍼포먼스. 그러나 실제로 경공술의 SF적 프리즈 쇼트와 한가로운 산책 사이 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 작가의 ‘평화로운 문약’이자 거의 늑대 여인의 본능이다. 본래 늑대란 초원에 사는 샤먼의 메신저로서 달을 보면 공중제비를 도는 습성이 있다. 우먼, 즉 Woman이란 말 자체가 Wolfman이었다고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많되 몸짓은 적다”라는 명제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주름진 신체가 필요한데, 작가는 자신의 몸이 부대해지는 과정에서 돌연 시간의 리와인드를 통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사이의 괴리를 뛰어넘는 안무를 보여준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시간 이미지로서 역습을 가해 ‘역사의 빈 페이지’를 넘기는 마음으로 예술 실행을 하는 지점일것이다. 무엇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가. 일단 영상작품 〈Away in Mongolia〉(2012)에서 홍이현숙이 초원의 현존을 실행하면서 저 지평선이 촉발하는 시각적 소실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말해야겠다. 사실 그 소실점은 ‘지평선 극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시각과 비−시각이 구분되지 않는, 흐린 초점의 비식별역이다. 사실이 ‘예외상태’의 공간이 유라시아의 사람들에게는 시각의 생산 기원이었다. 루소가 말한 바 있다.“우리에게는 청각에 대응하는기관, 즉 목소리라는 기관이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각에 대응하는 기관이 없으며, 소리를 만드는 것처럼 색깔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각은 능동적 기관과 수동적 기관을 서로 활용하면서 청각 (즉 촉지각)을 키우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청각은 촉지각이자 공명감각을 말하는데, 초원이라는 공간은 바로 공명의 공간이다. 트레이드마크처럼 꽃무늬가 있는 푸른 원피스 하나 입고 찌그러진 양산을 든 채, 작가가 걸어 들어가는 지평선은 단순히 원근법의 소실점을 통해 초원공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식별될 수 없는 지점에 접속하여 존재하는 것으로부터공명에 적셔진 시각을 호출하는 방식이다. 다음 장면에서 사막의 굴곡을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다가 역시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이 비식별역을 견인해와서 결국 게르와 게으르게 누운 낙타라는 초원공간의 아이콘을 경유하여 도시와 디졸브 시킨다. 이제 이 도시는 무엇인가. 이 도시는 재생되었는가. 확실한 것은 도시가 황량한 사막 이라는 네거티브한 인식이 아니라 모든 것이 열려지고 공명되는 초원의 공간에 매개되었다는 포지티브한 인식으로 전환된다. 이 도시와 대지의 대위법은 모더니즘 영화의 수법인 디졸브로 매우 간단하게 연결되었으면서도 ‘작가의 현존’이 이 장소들의 연합에 개입하여 ‘소리를 만드는 것처럼 색깔’을 만들고자 한다. 여기서 ‘색깔’이란 물론 메를로 퐁티가 말한 사물이나 사태의 속성이다. 이 ‘색깔’이란 우리의 지각 장치가 매우 사이버네이티드한 상태임을 최초로 지적 한 것이기도 하다. 자연의 감각적 인지와 컴퓨터의 결합 같은 것이다. 야생적 사고가 발동될 때 원시인은 날 때부터 이 인공 두뇌 장치같은 것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홍이현숙은 야생적이며 대칭적인 감각을 사용한다. 도시에서 지구의 굴곡 같은 것을 재발견하는 〈북가좌동 엘레지〉(2009)를 상기해보자. 아파트공간 사이사이 퇴락한 빈터에서 자라난 식물들이 암녹색의 괴물처럼 군락을 이루자, 그 역시 지구적 맥락의 대지로 착시된다. 작가는 예의 꽃무늬 푸른 원피스를 입고 출현하여 오줌을 누거나 야외에 설치 된 샤워기로 몸을 씻거나 물구나무를 선다.아파트보다 선재해 있는 대지의 감각에 동조하여 재생의 맥놀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커팅에지가 없이 대범하면서도 분절적인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이 영상은 앞서 본 초원의 영상과도 연루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현대의 도시라는 매우 기능화된 영역에서 공시적인 비판 같은 것을 진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도시에 내재해 있지만도시 자체는 의식하지 못하는 지구사적인 매크로 한 시간을 들이대어 그 시간 이미지에 부합하는 야생의 에너지를 흐름으로 범람시킨다는 것이다. 도시라는 ‘압도적인비대칭’ 에 대해서 그 도시가 억압해온 자연의 생명력이 콘크리트 틈새로 스며나와 리좀처럼 번성해버린, 마치 인간의 종말 이후의 자연 상태 같은 ‘대칭성’의 회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시인 이상이 읊은 “들쥐와 같은 험준한 지구 등성이를 포복하는 짓”은 사실 오줌이 흘러가면서 하는 짓인데, 홍이현숙 작가가 이 영상에서 하는 배설의 의미와 거의 같다. 대칭성의 회귀는 홈 파인 공간을 흘러가는 일방 통행이 아니라 평평한 공간을 예측불허로 내려가는 미지의 비선형곡선에서 비롯된다.
홍이현숙의 퍼포먼스는 디테일의 악마와도 같은 커팅에지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하는 판이 거시적이고 무의식과 충동이 각을 대신하여 에너지의 흐름을 만든다. 이 흐름의 판은 지구 차원의 대지적 굴곡을 생각 해야한다.지구를가이아라고부르기위해서는얼마만큼가없이넓은규모의대지가필요한가. ‘대칭적무의식’은 그러한 개체적 변이보다는 전체의 종(species)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부분 속에 전체가 있다. 위계가 없으므로 무례를 범하며, 부모 자식사이의 서열이 무너져 교환될 수 있다. “그래,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 “나, 앙토냉아르토, 나는 내아들이고 내 아버지고 내 어머니고 또 나다.” (아르토) 무엇이든될수있는 상태로서 알[卵], 혹은 기관 없는 신체가 되기 위해서 ‘대칭적 무의식’은 시간의 역행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선형은 모든 격자의 사회적 상징계를 추인하고, 그 내부로 들어가 순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역행은 무엇이든 변신할 수 있는 무의식 상태로의 복귀이다. 홍이현숙에게 이러한 시간 역행은 〈폐경의례〉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다. 2012년 진행된 이 연속 퍼포먼스이자 영상은‘폐경(閉經)’즉‘경로가막히다’라는네거티브한지점과‘폐경(廢境)’즉‘경계를폐기하다’라는포지티브한 지점을 동시적으로 연결한다. 작가의 자전적인 부분에서 ‘폐경’의 영역이 신체적으로 도래한 시점에서 오히려 시간 역행을 감행하여 신체를 열린 회로의 공간으로 돌려놓는다고할까. 여성의 생리혈이란 생명력의 징후로서 매우 중요한 질료이다. 백남준의 경우, 〈어느 아름다운 여성 화가의 연대기〉에서 “1월에는 미국 국기에 생리혈을 물들여라 / 2월에는 버마 국기에 생리혈을 물들여라 / (…)”로 진행되는 플럭서스 스코어 타입의 음악 퍼포먼스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물은 1963년 〈음악의 전시〉에 설치된 바 있다. 그와 거의 유사한 감각으로 이 작가는 여러 다른 형태의 용기에 생리혈을 달인 용액을 짜서 붓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몸에다가 마치《반야심경》을 쓰는듯한 감각으로 쓰기 시작한다. 일종의‘피의책’이라고할까.무엇이든가능하다,라는 ‘대칭적 무의식’의 선언문이라고 할까. 보통 갱년기 이후 여성에게 ‘폐경’이란 불가역한 신체의 한 단계로서 생명 잉태의 잠재력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우울하거나 불쾌감이 엄습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가는 그 몸의 상태를 전복시켜 버린다. ‘경로가 막히다’라는 사태는 다시 말해서 여성의 ‘여성됨’ 이라는 기관적인 부분의 기능적 정지이다.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은 열리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여성도 노력해야만 여성−되기가 된다는 것은 몸의 열린 가능성으로서 변신이란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변신을 일으키기 위한 충동의 리비도가 꼭 신체 내부에만 흘러넘치고 젊은 신체에만 국한된 것인가. 아니다. 몸이 갖는 역사성의 주름 속에 접힘과 펼쳐짐이라는 이중의 운동은 얼마든지 그 젊은 신체를 불러낼 수도 있다. 〈Moon in Norway〉(2012)에서 박단마가 부르는 노래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가 깔리는 가운데 북유럽의 바다에 알몸으로 빙하욕을 하는 중년 여인들의 대담무쌍한 퍼포먼스를 다시 상기해보자. 주름진 작은 신체들 다수가 연합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신체라는 것은 명확해진다. 어느 계기에서 그 신체들 중에 예기치 않은 기억의 분출이자 현실화로서 소녀가 불려나올 수 있다. 작가는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여전히 늙어가는 신체라는 스탠스에서 이 주름진 다양체 내부에 꼬깃꼬깃한 접힘과 펼쳐짐의 운동, 이것이 시간 역행이 가능한 ‘대칭적 무의식’이라는조건이라는것이다. 좌우간 이작가는〈폐경의례〉의 첫 장면에서 유머감각과 복선을 깔듯이 ‘비행술과축지법’ 이라는 간판을 슬쩍 공개하는데, 어느 고비에 이르면 건물과 건물 사이를 휙휙 나는 장관을 스스로 연출한다. 그 대부분의 기록이 프리즈 쇼트의 정지 화면인데, 이것은 도상 해석을 거부한 채 강렬한 스탠스와 비상, 새가 된 변신, 닌자와 강호무협의 고수가 보여주는 허공답보, 축지법의 시전 같은 퍼포먼스의 시간적 응결이다. 어떤 컷은 이브 클랭 의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과도 유사하지만, 맥락은 전혀 다르다. 늑대 여인이 ‘억압당하지 않은 무의식’ 상태에서는 어떻게 에너지의 흐름을 재편하고 세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가를 잠재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퍼포먼스가 샤먼이 주재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넘볼 때, 이미 그 퍼포머는 늑대와 같은 메신저이자 매개자가 되어있는셈이다. 초원을 종축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마치 구리 거울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구리 거울의 감각은1)자신의 얼굴이 반영되지 않아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다, 2) 시각보다는 빛을 내뿜는 기능으로 악기운을 쫓는 역할이다, 3)우주와 지리에 관한 총체적인 지식을 직관한다 등등으로 표현된다. 홍이현숙은 이러한 구리 거울의 감각을 상당 부분 발휘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으며, 자신과 세계가 하나로 혼돈된 부분으로 보여지는것을 허락하고, 우주론적·지리학적 배치를 가동한다. “억압당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라는 프로이트의 명제는거짓말이다.유라시아대륙에서는통용되지않는무의식이다.이가없는대지에서는“무의식은마음의 기층부를 뜻하며, 억압당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이 낳는 끊임없는 생산력이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은근한 ‘고원’ 상태가 필요하다.즉 중간 상태에서 중간 상태로 은근히 지펴진 낮은 불 처럼 클라이맥스 없이 지속되려는 힘이다. 감흥의 고원 상태는 사실 표현주의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성하려는 새로운 야만인들(베냐민)에게느껴지는강자의여유이다. 영상 〈Body Rolling〉(2006)에서 스크린 한가운데를 빈터[空所]로 두고 가장자리를 마치 알처럼 몸을 굴려가는 (사실은 뭉기적거리는)방식의 퍼포먼스는 이 ‘고원’ 상태의 감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회적 호출로 인해 야생의 액셔니스트에게 그 욕망이 무력화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힘들 때, 히스테리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작가에게 그런 징후는 없다. 그는 사회적 대타자가 간섭하여 복제해낸 욕망이 아니라 스스로 추동하는 야생의 욕망으로 기어서 넘고자 한다. 〈폐경의례〉에서 이러한 욕망은 “나는 나를 막지 않으리. 한 마리 뱀처럼”이란 퍼포머티브로 표현된 바 있다. ‘피의책’이 쓰여진 작가의 몸이 욕탕 속에서 물뱀처럼 헤엄치다가, 이것이 다시 자연 상태의 냇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으로 디졸브된다. 이 환시의 디졸브는 ‘대칭적 무의식’의 장치이다. 현대 사상에서 뱀이란 이미 저항의 한 형식이 되어버렸다. 마르크스가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두더지’의 혁명을 주장했다면, 들뢰즈는 현실의 대지 표면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지의 굴곡을 모두 체감하면서도 지그재그 배가 본드로서 예측 불허의 비선형을 보여주는 ‘뱀’의 혁명을 주장했다. 홍이현숙의 은근한 결기에는 이러한 ‘뱀’의 저항적 동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의 연동이 보다 진전된 타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예술 안에서의 미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비–예술이 갖는 암묵지(tacit knowledge)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선명하게 말할 수 없는 무의식, 그러나 예술의 윤곽 바깥으로 흘러넘쳐서 ‘불화’의 생산을 빚고 있는 무의식, 그것으로 쉼 없이 생산하는 무의식의 퍼포먼스인 셈이다.
2013년12월
퍼포먼스가 샤먼이 주재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넘볼 때, 이미 그 퍼포머는 늑대와 같은 메신저이자 매개자가 되어있는셈이다. 초원을 종축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마치 구리 거울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구리 거울의 감각은1)자신의 얼굴이 반영되지 않아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다, 2) 시각보다는 빛을 내뿜는 기능으로 악기운을 쫓는 역할이다, 3)우주와 지리에 관한 총체적인 지식을 직관한다 등등으로 표현된다. 홍이현숙은 이러한 구리 거울의 감각을 상당 부분 발휘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으며, 자신과 세계가 하나로 혼돈된 부분으로 보여지는것을 허락하고, 우주론적·지리학적 배치를 가동한다. “억압당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라는 프로이트의 명제는거짓말이다.유라시아대륙에서는통용되지않는무의식이다.이가없는대지에서는“무의식은마음의 기층부를 뜻하며, 억압당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이 낳는 끊임없는 생산력이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은근한 ‘고원’ 상태가 필요하다.즉 중간 상태에서 중간 상태로 은근히 지펴진 낮은 불 처럼 클라이맥스 없이 지속되려는 힘이다. 감흥의 고원 상태는 사실 표현주의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성하려는 새로운 야만인들(베냐민)에게느껴지는강자의여유이다. 영상 〈Body Rolling〉(2006)에서 스크린 한가운데를 빈터[空所]로 두고 가장자리를 마치 알처럼 몸을 굴려가는 (사실은 뭉기적거리는)방식의 퍼포먼스는 이 ‘고원’ 상태의 감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회적 호출로 인해 야생의 액셔니스트에게 그 욕망이 무력화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힘들 때, 히스테리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작가에게 그런 징후는 없다. 그는 사회적 대타자가 간섭하여 복제해낸 욕망이 아니라 스스로 추동하는 야생의 욕망으로 기어서 넘고자 한다. 〈폐경의례〉에서 이러한 욕망은 “나는 나를 막지 않으리. 한 마리 뱀처럼”이란 퍼포머티브로 표현된 바 있다. ‘피의책’이 쓰여진 작가의 몸이 욕탕 속에서 물뱀처럼 헤엄치다가, 이것이 다시 자연 상태의 냇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으로 디졸브된다. 이 환시의 디졸브는 ‘대칭적 무의식’의 장치이다. 현대 사상에서 뱀이란 이미 저항의 한 형식이 되어버렸다. 마르크스가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두더지’의 혁명을 주장했다면, 들뢰즈는 현실의 대지 표면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지의 굴곡을 모두 체감하면서도 지그재그 배가 본드로서 예측 불허의 비선형을 보여주는 ‘뱀’의 혁명을 주장했다. 홍이현숙의 은근한 결기에는 이러한 ‘뱀’의 저항적 동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의 연동이 보다 진전된 타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예술 안에서의 미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비–예술이 갖는 암묵지(tacit knowledge)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선명하게 말할 수 없는 무의식, 그러나 예술의 윤곽 바깥으로 흘러넘쳐서 ‘불화’의 생산을 빚고 있는 무의식, 그것으로 쉼 없이 생산하는 무의식의 퍼포먼스인 셈이다.
2013년12월
The Symmetric Unconsciousness and the Adventurous Action film of a Female Wolf
Kim, Nam−Su(choreography critic)
Kim, Nam−Su(choreography critic)
Given the question, “Who in the world began crawling on the rugged back of the earth like a field mouse”
( Le Urine, Lee Sang, Korean poet), it means Korean writers are not being boiled within the territory like the frogs in a well are but touching the world system(Wallerstein) and asks who touches it. The touch can be made under the condition that one drops a tiny−dish−sized style, so−called “The devil is in the detail” and works on a bold large scale. Hong Lee, Hyun−Sook, shows an amazing respond to the condition, in which she blends the earth and city, life and reproduction, and art of making an extraordinary flight and leisurely promenade, asking back “What on earth is the art?” She doesn’t challenge the paradox of the half−opened door that Kafka mentioned, on the stage of
pre−established and pre−formed dominant art. She just ignores. Rather, she walks on a real desert and meadow, and dissolves the walks to let them be brought in the city stagnant like devil’s mouth. Though Rousseau advised “Do not forget the walls of the cities are formed only remains of the houses of the fields”, to Hong Lee, Hyun−Sook, the city is not the counter term to the field but the dependent term to the raw earth; the city as a misbegotten child the earth gave a birth to. Why? Because the dissolve of the earth and city means the latter is embodied in the former. The art exists only as the edge of non−art until it is registered in art history and being an art in the contemporary art society actually means being in a situation of intersubjective temporary instability. Therefore, ‘non−art’ far more performative than ‘being an art’ can give us a cognitive impact. Even if it is excepted from the artistic. The theory of exception is the issue of ‘the state of exception’ as Italy philosopher Agamben states, which brings a weird and paradoxical situation into life that being excepted as ‘non−art’ means embodying the excepted at the same time. Hence ‘non−art’ is strong and brings up a sort of attitude matter in an upper way rather than in the obvious system of art.When Harald Szeemann states when attitudes become form, I think ‘form’ means ‘creation’. The idea has great dynamics in that what attitude one takes itself creates a world. The term ‘attitude’ can encompass a variety of notions such as stance, viewpoint, gesture, position, fortune and living. Come to think of it, these notions hold what attitude we keep. This is the year, 1968. The May and the revolution, and the ban on sur−reality. I feel the dynamics as such non−art and attitude. It’s not a job for everyone to “crawl on the rugged back of the earth like a field mouse”. Neither is ‘to create the thread moved little by little with a sacred smile’. How is it possible that the potential in the wrinkles of the middle−aged woman suddenly wakes up and conducts some performance of cognitive impact in the state of impulse and unconsciousness? The performance corresponding to the very rare gesture of “many people few gestures” mentioned in Immortality by Milan Kundera. However, what is actually sensed between the SF−like freeze shot of an extraordinary flight and leisurely promenade is her ‘peaceful literary jump’ and instinct of a woman of a wolf. A wolf originally has a habit of turning a somersault at the sight of the moon as the messenger of a shaman living on plains. The word, Woman itself is said to be derived from Wolfman.
Important is that wrinkled body required to correspond to the proposition “many people few gestures”, and she
demonstrates the choreography beyond the gap between the potential and the real by a sudden rewind of time in
the process of her being corpulent. In a way, it might be the point to practice art thinking of turning over “the empty
pages of history” by counterattacking with time image. What makes me say so. I should mention first that, in the video work Away in Mongolia (2012), Hong, Lee Hyun−Sook walks into the visual vanishing point that the horizon stimulates, carrying out the existence of plain. The vanishing point can be actually called ‘the horizon theater’ which is non−identification area where vision and non−vision are not distinguished. The space of ‘exceptional state’ was the origin of producing sight to Eurasians. Rousseau stated “We have an organ that corresponds to that of hearing, that is, the voice. Sight has nothing like this, for though we can produce sounds, we cannot give off colors.” He argued, therefore, sight is means of cultivating hearing, that is, tactual perception, by exercising active and passive organs upon one another. Here, hearing means tactual perception and resonance sense, so the space of plain is the very space of resonance. The horizon she walks into, wearing a floral patterned blue one−piece dress like a trademark and holding a rib−broken parasol, does not lay mere claim to the space of plain through the vanishing point of perspective but shows the way to call the sight wet in resonance out of the existent by accessing to the point visually not distinguishable. In the next scene, she keeps appearing and disappearing along the curve of dessert and then disappears beyond the horizon. She pulls the non−identification area, via the icon of plain, a ger and a lazy lying camel, and finally dissolves it in the city. Now what is the city? Is it reproduced? Certain is that the negative cognition of the city as the barren desert is switched to the positive cognition that it is linked to the space of plain where everything is opened and resonated. While the counterpoint of city and plain is so simply linked by dissolve, the technique of modernism film, ‘presence of the artist’ intervenes in combining the places to create “colors like making sounds.” Here ‘colors’ mean, of course, the properties of phenomenal or experienced objects. The ‘colors’ pointed out for the first time that our perceptional apparatuses are in a highly cybernated state. It is like linking sensible cognition of nature with computer. Having wild thinking invoked, we realize that a primitive man was born with cybernetic apparatuses. Hong, Lee Hyun−Sook uses wild and symmetric sense. Let’s recall Bookgajwa−dong Elegy (2009) that rediscovers in the city something like the curve of the earth. As the plants grown in dilapidated vacant ground among apartments form a colony like a dark green monster, it is given the optical illusion as the ground in the context of the earth. She appears in the very floral printed blue one−piece dress, urinating, cleaning herself with the shower installed outdoors or standing on her hands. She is to perform the beating of reproduction sympathizing with the sense of plain preexisting apartments. The image run with bold segmental performances with no cutting edge is linked to that of plain previously seen. However, the most significant is the video does not proceed with mere synchronic criticism in such a functionalized area, modern city, but thrust earth−historical macro time which is inherent in the city but not sensed by the city itself, and then flood it with the wild energy corresponding to the image of the time. To ‘the overwhelming asymmetry’ of the city, it presents the return of ‘symmetry’ which is like the state of the nature after Armageddon that the life force of the nature oppressed by the city squeezes out through concrete gaps and flourishes like Rhyzome. “Crawling on the rugged back of the earth like a field mouse” recited by Lee Sang is actually what flowing urine does, which has almost the same meaning to the excretion Hong Lee, Hyun−Sook does in the video. The return of symmetry proceeds from not one−way flowing to grooved space but unforeseeable mystery nonlinear curve flowing down flat space.
( Le Urine, Lee Sang, Korean poet), it means Korean writers are not being boiled within the territory like the frogs in a well are but touching the world system(Wallerstein) and asks who touches it. The touch can be made under the condition that one drops a tiny−dish−sized style, so−called “The devil is in the detail” and works on a bold large scale. Hong Lee, Hyun−Sook, shows an amazing respond to the condition, in which she blends the earth and city, life and reproduction, and art of making an extraordinary flight and leisurely promenade, asking back “What on earth is the art?” She doesn’t challenge the paradox of the half−opened door that Kafka mentioned, on the stage of
pre−established and pre−formed dominant art. She just ignores. Rather, she walks on a real desert and meadow, and dissolves the walks to let them be brought in the city stagnant like devil’s mouth. Though Rousseau advised “Do not forget the walls of the cities are formed only remains of the houses of the fields”, to Hong Lee, Hyun−Sook, the city is not the counter term to the field but the dependent term to the raw earth; the city as a misbegotten child the earth gave a birth to. Why? Because the dissolve of the earth and city means the latter is embodied in the former. The art exists only as the edge of non−art until it is registered in art history and being an art in the contemporary art society actually means being in a situation of intersubjective temporary instability. Therefore, ‘non−art’ far more performative than ‘being an art’ can give us a cognitive impact. Even if it is excepted from the artistic. The theory of exception is the issue of ‘the state of exception’ as Italy philosopher Agamben states, which brings a weird and paradoxical situation into life that being excepted as ‘non−art’ means embodying the excepted at the same time. Hence ‘non−art’ is strong and brings up a sort of attitude matter in an upper way rather than in the obvious system of art.When Harald Szeemann states when attitudes become form, I think ‘form’ means ‘creation’. The idea has great dynamics in that what attitude one takes itself creates a world. The term ‘attitude’ can encompass a variety of notions such as stance, viewpoint, gesture, position, fortune and living. Come to think of it, these notions hold what attitude we keep. This is the year, 1968. The May and the revolution, and the ban on sur−reality. I feel the dynamics as such non−art and attitude. It’s not a job for everyone to “crawl on the rugged back of the earth like a field mouse”. Neither is ‘to create the thread moved little by little with a sacred smile’. How is it possible that the potential in the wrinkles of the middle−aged woman suddenly wakes up and conducts some performance of cognitive impact in the state of impulse and unconsciousness? The performance corresponding to the very rare gesture of “many people few gestures” mentioned in Immortality by Milan Kundera. However, what is actually sensed between the SF−like freeze shot of an extraordinary flight and leisurely promenade is her ‘peaceful literary jump’ and instinct of a woman of a wolf. A wolf originally has a habit of turning a somersault at the sight of the moon as the messenger of a shaman living on plains. The word, Woman itself is said to be derived from Wolfman.
Important is that wrinkled body required to correspond to the proposition “many people few gestures”, and she
demonstrates the choreography beyond the gap between the potential and the real by a sudden rewind of time in
the process of her being corpulent. In a way, it might be the point to practice art thinking of turning over “the empty
pages of history” by counterattacking with time image. What makes me say so. I should mention first that, in the video work Away in Mongolia (2012), Hong, Lee Hyun−Sook walks into the visual vanishing point that the horizon stimulates, carrying out the existence of plain. The vanishing point can be actually called ‘the horizon theater’ which is non−identification area where vision and non−vision are not distinguished. The space of ‘exceptional state’ was the origin of producing sight to Eurasians. Rousseau stated “We have an organ that corresponds to that of hearing, that is, the voice. Sight has nothing like this, for though we can produce sounds, we cannot give off colors.” He argued, therefore, sight is means of cultivating hearing, that is, tactual perception, by exercising active and passive organs upon one another. Here, hearing means tactual perception and resonance sense, so the space of plain is the very space of resonance. The horizon she walks into, wearing a floral patterned blue one−piece dress like a trademark and holding a rib−broken parasol, does not lay mere claim to the space of plain through the vanishing point of perspective but shows the way to call the sight wet in resonance out of the existent by accessing to the point visually not distinguishable. In the next scene, she keeps appearing and disappearing along the curve of dessert and then disappears beyond the horizon. She pulls the non−identification area, via the icon of plain, a ger and a lazy lying camel, and finally dissolves it in the city. Now what is the city? Is it reproduced? Certain is that the negative cognition of the city as the barren desert is switched to the positive cognition that it is linked to the space of plain where everything is opened and resonated. While the counterpoint of city and plain is so simply linked by dissolve, the technique of modernism film, ‘presence of the artist’ intervenes in combining the places to create “colors like making sounds.” Here ‘colors’ mean, of course, the properties of phenomenal or experienced objects. The ‘colors’ pointed out for the first time that our perceptional apparatuses are in a highly cybernated state. It is like linking sensible cognition of nature with computer. Having wild thinking invoked, we realize that a primitive man was born with cybernetic apparatuses. Hong, Lee Hyun−Sook uses wild and symmetric sense. Let’s recall Bookgajwa−dong Elegy (2009) that rediscovers in the city something like the curve of the earth. As the plants grown in dilapidated vacant ground among apartments form a colony like a dark green monster, it is given the optical illusion as the ground in the context of the earth. She appears in the very floral printed blue one−piece dress, urinating, cleaning herself with the shower installed outdoors or standing on her hands. She is to perform the beating of reproduction sympathizing with the sense of plain preexisting apartments. The image run with bold segmental performances with no cutting edge is linked to that of plain previously seen. However, the most significant is the video does not proceed with mere synchronic criticism in such a functionalized area, modern city, but thrust earth−historical macro time which is inherent in the city but not sensed by the city itself, and then flood it with the wild energy corresponding to the image of the time. To ‘the overwhelming asymmetry’ of the city, it presents the return of ‘symmetry’ which is like the state of the nature after Armageddon that the life force of the nature oppressed by the city squeezes out through concrete gaps and flourishes like Rhyzome. “Crawling on the rugged back of the earth like a field mouse” recited by Lee Sang is actually what flowing urine does, which has almost the same meaning to the excretion Hong Lee, Hyun−Sook does in the video. The return of symmetry proceeds from not one−way flowing to grooved space but unforeseeable mystery nonlinear curve flowing down flat space.
In the performance of Hong Lee, Hyun−Sook, cutting edge like the devil in the detail is not sensed much.
With the macroscopic stage she deals with, unconsciousness and impulse create the flow of energy instead of
the edge. The stage of flow needs to recall the curve of plain in the level of the earth. How endlessly broad plain is
needed to call the earth Gaea. ‘Symmetric unconsciousness’ has interest in general species rather than individual
modification. In parts is the whole. Having no rank allows to be discourteous and exchange the ranks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Yes, I am my father and my son. I, Antonin Artaud, am my son, my father, my mother, myself.”
(Artaud) ‘Symmetric unconsciousness’ can do nothing but try time−retrogression to be the egg as the state of whatever to be or the body with no apparatus. Linearity of time confirms the world of social symbol and enters the inside to be habituated. Time−retrogression is, however, the return to the state of unconsciousness where we can transform into anything.
The time−retrogression of Hong Lee, Hyun−Sook can be sensed in the series Menopause, Shedding boundary.
The serial performances and video proceeded in 2012 coincidentally links the negative point of ‘menopause
(閉經)’ meaning “the route blocked” to the positive point of ‘Shedding boundary (廢境)’ (The two words are homonym in Korean). It’s like she rather executes a time−retrogression at the physical advent of ‘menopause’ area in her autobiographical part to turn the body into the space of open circuit. Menstruation of a woman is a very critical
substance as a sign of the vital force. Paik Nam−June carried out the Fluxus−score−type music performance in
The Chronicle of a beautiful female artist proceeding with “Wet the Stars and Stripes with menstruation in
January/ Wet the Burmese national flag with menstruation in February/(…).” The work was installed in Exposition of
Music in 1963. With the almost similar sense, she pours the boiled−down solution of menstruation in a few different
shaped containers. And then she starts writing in it on the body as if writing Prajña−Paramita. It might be called a
sort of ‘the book of blood or the declaration of ‘symmetric unconsciousness’ meaning anything is possible.
To climacteric women, ‘menopause’ usually means the state of extinct pregnancy−potential as the irreversible
physical stage. Most women state they are seized by a sense of depression or displeasure. The artist, however, overturns the state of the body. The event that “the route is blocked” means, in other words, the functional stop from ‘being female’ of women in terms of organ. She asks back if another possibility then will not be opened. To be female needs even a woman to make an effort, which implies that transformation as the open possibility is not obvious. Then it brings out a doubt whether libido of impulse to cause transformation is to run off within a body and to be limited in a young body. Surely not. The double movement, folding and unfolding, inherent in the wrinkles of history can call the young body out in any degree.
Recall again the audacious performance of the middle−aged women in Moon in Norway(2012), taking a glacier bath
in complete nudity in the sea of Northern Europe with the back ground song “I am 17 years old” by Park Dan−Ma.
It becomes clear that the combination of many wrinkled small bodies is the very our bodies. By an opportunity,
the girl can be called out of the bodies as the spurt and realization of an unexpected memory. The artist makes the
point clear. At the stance of the body getting old, this, the movement of creased folding and unfolding inside the
various wrinkled bodies, is the condition of ‘symmetric unconsciousness’ where time−retrogression is possible.
With the macroscopic stage she deals with, unconsciousness and impulse create the flow of energy instead of
the edge. The stage of flow needs to recall the curve of plain in the level of the earth. How endlessly broad plain is
needed to call the earth Gaea. ‘Symmetric unconsciousness’ has interest in general species rather than individual
modification. In parts is the whole. Having no rank allows to be discourteous and exchange the ranks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Yes, I am my father and my son. I, Antonin Artaud, am my son, my father, my mother, myself.”
(Artaud) ‘Symmetric unconsciousness’ can do nothing but try time−retrogression to be the egg as the state of whatever to be or the body with no apparatus. Linearity of time confirms the world of social symbol and enters the inside to be habituated. Time−retrogression is, however, the return to the state of unconsciousness where we can transform into anything.
The time−retrogression of Hong Lee, Hyun−Sook can be sensed in the series Menopause, Shedding boundary.
The serial performances and video proceeded in 2012 coincidentally links the negative point of ‘menopause
(閉經)’ meaning “the route blocked” to the positive point of ‘Shedding boundary (廢境)’ (The two words are homonym in Korean). It’s like she rather executes a time−retrogression at the physical advent of ‘menopause’ area in her autobiographical part to turn the body into the space of open circuit. Menstruation of a woman is a very critical
substance as a sign of the vital force. Paik Nam−June carried out the Fluxus−score−type music performance in
The Chronicle of a beautiful female artist proceeding with “Wet the Stars and Stripes with menstruation in
January/ Wet the Burmese national flag with menstruation in February/(…).” The work was installed in Exposition of
Music in 1963. With the almost similar sense, she pours the boiled−down solution of menstruation in a few different
shaped containers. And then she starts writing in it on the body as if writing Prajña−Paramita. It might be called a
sort of ‘the book of blood or the declaration of ‘symmetric unconsciousness’ meaning anything is possible.
To climacteric women, ‘menopause’ usually means the state of extinct pregnancy−potential as the irreversible
physical stage. Most women state they are seized by a sense of depression or displeasure. The artist, however, overturns the state of the body. The event that “the route is blocked” means, in other words, the functional stop from ‘being female’ of women in terms of organ. She asks back if another possibility then will not be opened. To be female needs even a woman to make an effort, which implies that transformation as the open possibility is not obvious. Then it brings out a doubt whether libido of impulse to cause transformation is to run off within a body and to be limited in a young body. Surely not. The double movement, folding and unfolding, inherent in the wrinkles of history can call the young body out in any degree.
Recall again the audacious performance of the middle−aged women in Moon in Norway(2012), taking a glacier bath
in complete nudity in the sea of Northern Europe with the back ground song “I am 17 years old” by Park Dan−Ma.
It becomes clear that the combination of many wrinkled small bodies is the very our bodies. By an opportunity,
the girl can be called out of the bodies as the spurt and realization of an unexpected memory. The artist makes the
point clear. At the stance of the body getting old, this, the movement of creased folding and unfolding inside the
various wrinkled bodies, is the condition of ‘symmetric unconsciousness’ where time−retrogression is possible.
Allowing a quick look at the sign “The Art of Flying and Contracting Distance” in the first scene of Menopause,
Shedding boundary as if laying a sense of humor and an underplot, the artist herself acts out a magnificent
spectacle of flying over between buildings at a crisis. Most of the records are still pictures of freeze shot, which are
the performances temporally frozen such as compelling stance and soaring out of denying ballast analysis,
walking in the air presented by a ninja and master of martial art, and a display of contracting distance. A cut is similar
to the scene of Yves Klein throwing himself out of the window but the context is completely different. It is the way
implying how a woman of a wolf can reshuffle the flow of energy and reset the world under the state of ‘unoppressed unconsciousness’. When a performance covets the flow of energy under shaman’s charge, the performer is already a messenger and a mediator like a wolf.
Walking into the plain along the axis of ordinates is like looking in a copper mirror. The sense of copper mirror is
described as follows; 1) keeping one from falling under narcissism as the face is not reflected in it, 2) playing a role
in driving evil energy out with the function of emitting light rather than vision, and 3) intuiting holistic knowledge
of the universe and geography. Hong Lee, Hyun−Sook demonstrates the sense of copper mirror in full degree.
She doesn’t fall under narcissism, allows the world and herself to be seen as one in a chaotic state, and operates
cosmological − geographical arrangement. The proposition of Freud “the insistent return of the repressed” is false.
It is the unconsciousness which is not used in the Eurasian Continent. In the endless plain, “unconsciousness means
the basic floor of heart and the ceaseless productive force that the unrepressed heart creates.” To meet the condition requires the slow but steady state of ‘plateau’, in other words, the power to be continued with no climax like a low fire steadily made in a mild state. Inspiring state of plateau is actually not expressionism but the composure of the strong sensed by new barbarians (Benjamin) trying to generate something.
In the video Body Rolling (2006), the performance of rolling her body – actually rubbing – like an egg along
the edge with the vacant site left in the middle of the screen, might be said to demonstrate the inspiring state of
‘plateau’. Hysterics will arise to a wild actionist when the desire is incapacitated by social call and blazing a trail is hard. However, such a symptom is not found in the artist. She crawls over with not the cloned desire interfered by social replacement but the wild desire driven by herself.
In Menopause, Shedding boundary, the desire has been described with the performative “I will not stop myself,
like a snake”. Her body ‘the book of blood’ is written on swims like a snake in the bath, which is dissolved in the
scene of swimming in the brook in natural state. The dissolve of a visual hallucination is the installation of
‘symmetric unconsciousness’. A snake has already been a form of resistance in modern ideas. While Marx argued
the revolution of ‘mole’ periodically appearing, Deleuze insisted that of ‘snake’ feeling all the curves of plain without
being off its surface in reality and presenting unpredictable nonlinear movement as a zigzagging vagabond.
From her mild but decisive nature is sensed the resistant movement of snake. Still, the linkage to the political and
social is not practiced yet in a more progressed type. It can be called the aesthetic within non−art and the authority of tacit knowledge from non−art. It might be the performance of the unconsciousness unable to give a clear description but running off the outline of art, creating the production of ‘discord’ and keeping production with it.
Shedding boundary as if laying a sense of humor and an underplot, the artist herself acts out a magnificent
spectacle of flying over between buildings at a crisis. Most of the records are still pictures of freeze shot, which are
the performances temporally frozen such as compelling stance and soaring out of denying ballast analysis,
walking in the air presented by a ninja and master of martial art, and a display of contracting distance. A cut is similar
to the scene of Yves Klein throwing himself out of the window but the context is completely different. It is the way
implying how a woman of a wolf can reshuffle the flow of energy and reset the world under the state of ‘unoppressed unconsciousness’. When a performance covets the flow of energy under shaman’s charge, the performer is already a messenger and a mediator like a wolf.
Walking into the plain along the axis of ordinates is like looking in a copper mirror. The sense of copper mirror is
described as follows; 1) keeping one from falling under narcissism as the face is not reflected in it, 2) playing a role
in driving evil energy out with the function of emitting light rather than vision, and 3) intuiting holistic knowledge
of the universe and geography. Hong Lee, Hyun−Sook demonstrates the sense of copper mirror in full degree.
She doesn’t fall under narcissism, allows the world and herself to be seen as one in a chaotic state, and operates
cosmological − geographical arrangement. The proposition of Freud “the insistent return of the repressed” is false.
It is the unconsciousness which is not used in the Eurasian Continent. In the endless plain, “unconsciousness means
the basic floor of heart and the ceaseless productive force that the unrepressed heart creates.” To meet the condition requires the slow but steady state of ‘plateau’, in other words, the power to be continued with no climax like a low fire steadily made in a mild state. Inspiring state of plateau is actually not expressionism but the composure of the strong sensed by new barbarians (Benjamin) trying to generate something.
In the video Body Rolling (2006), the performance of rolling her body – actually rubbing – like an egg along
the edge with the vacant site left in the middle of the screen, might be said to demonstrate the inspiring state of
‘plateau’. Hysterics will arise to a wild actionist when the desire is incapacitated by social call and blazing a trail is hard. However, such a symptom is not found in the artist. She crawls over with not the cloned desire interfered by social replacement but the wild desire driven by herself.
In Menopause, Shedding boundary, the desire has been described with the performative “I will not stop myself,
like a snake”. Her body ‘the book of blood’ is written on swims like a snake in the bath, which is dissolved in the
scene of swimming in the brook in natural state. The dissolve of a visual hallucination is the installation of
‘symmetric unconsciousness’. A snake has already been a form of resistance in modern ideas. While Marx argued
the revolution of ‘mole’ periodically appearing, Deleuze insisted that of ‘snake’ feeling all the curves of plain without
being off its surface in reality and presenting unpredictable nonlinear movement as a zigzagging vagabond.
From her mild but decisive nature is sensed the resistant movement of snake. Still, the linkage to the political and
social is not practiced yet in a more progressed type. It can be called the aesthetic within non−art and the authority of tacit knowledge from non−art. It might be the performance of the unconsciousness unable to give a clear description but running off the outline of art, creating the production of ‘discord’ and keeping production with it.
Dec.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