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현숙은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달리 말하면 공고한 작업의 역사를 정립하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가부장제와 미술계 바깥으로 탈주를 시도해왔다. 지난해 12월 깊은 쓰레기 굴에서 기획한 〈오소리 A씨의 초대〉(부천아트벙커B39)는 지금껏 작가가 몸소 보여주던 감각을 관람객에게 직접 씌워준 본격 ‘되기’ 전시다. 현재 인간사회가 공생하려는 비인간 존재가 또한 한없이 작은 테두리 안에 있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홍이현숙의 ‘환대’에 대해 들어본다.

환대하는 몸    홍이현숙 | 작가
‘몸’이라는 장소
  비인간 - 물질, 생명체와 기계는 하나의 연속성 위에서 존재한다. 모든 것은 객체이고, 인간도 그중 한 객체일 뿐이다. 나와 오소리가 지금 얄짤없이 공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몸이다. 몸은 예측하지 못한 어떤 존재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다시 생겨난다. 나와 오소리 사이에서 통로로 존재하는 몸은 자연의 흐름을 연결하는 기관이다. 그것이 무엇과 연결되는지에 따라 고래가 될 수도 있고, 공중의 새가, 흐르는 물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작업은 나의 신체 일부다. 오소리의 날카로움으로 무장한 움직임과 풀무질이 나의 내부를 뚫고 들어와서는 헐렁한 품과 물렁물렁한 여유의 자리를 만든다. 그 작은 자리가 나를 바꾼다. 나와 오소리는 이제 둘 다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바깥에서 서로의 몸을 사유하며 구축하고, 때론 서로의 안으로 역류하며 변태, 변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살처분의 와중에도 뭉그적거리며 살아나는 돼지들이 있다. 목을 잘라도 죽지 않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자들이 있다. 학살의 장소에서 죽은 자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과 같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가 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극 속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고 목격하려는 것. 어떤 과정 속에 따로 떨어져 있다가도 변곡점에 같이 있고 같이 행동할 수 있다. 물론 언제든지 흩어질 수 있지만 받아쓸 수 없는 것을 받아쓰는 것을 무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 우리는 원래 나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내야만 한다.
‘오소리 A씨의 컴컴한 굴로의 초대’
  이번 작업을 나 나름대로 이름 붙여 ‘환대의 설치작업’이라 부른다. 전시장이 작은 체육관의 링처럼, 씨름판의 모래처럼 존재하기를 스스로 원하는 것이다. 즉 작가의 작품이 주연이 아닌 다만 ‘보조’로서, 껍데기로 존재하면서, 오히려 관객에게 시각을 제한하는 공포와 낯선 두려움 속의 ‘야생’으로 몸을 던지라는 능동을 요구한다. 하나의 신체가 이 공간을 주파함으로써만 완성되는, 작가가 제시한 공간의 운율에 따른 발걸음을 해야 하며 희한한 포즈, 이상한 날것의 자세, 필연적으로 생기는 수많은 즉흥과 어둠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남의 체온을 받아들이는 나를 바라보는 경험, 발가락, 혹은 발바닥이 언제 이렇게 뭔가를 적극적으로 만져본 적이 있을까? 해보지 않았으면 절대로 몰랐을 바닥 위 25cm의 허공이 주는 끝없는 불안감, 내 몸의 감각이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낯선 체험 나를 앞서가는 불안과 실재의 간격을 메우는 나도 몰랐던 나의 능력, 콧속으로 파고드는 오소리 배설물이 주는 이상한 안도감, 거기에 섞여서 깊이 들어오는 흙냄새, 낯선 곳에서의 편안한 누움. 직립이 아닌 누워야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 문득 열리는 내 신체의 구멍들, 각기 다른 임계치가 불러오는 관계의 변환을 감수해야 한다. 관객의 손끝과 작가의 제시 사이에서의 내밀한 소통, 한 번의 사건으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비로소 수련 혹은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이번 작업에서 또 하나 중요한 키워드는 어둠이다. 빛의 제어가 가장 중요한 솔루션이었다. 실제로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뜬 눈과 감은 눈이 분별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빛을 차단했다. 보통의 관객은 그 어둠 속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거나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데 ‘빛 오염(light pollution)’이란 말도 있듯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암흑의 상태를 불과 10분도 못 견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VR작업이, 시각에 모든 감각이 종속되는 놀라운 경험이라면 이번 작업은 그 대척점에서 시작한다. 인간을 오히려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시각, 다른 감각에 앞서서 다른 감각들을 뒤로 밀치는 시각이 작동하는 낭비의 메커니즘, 이미 다 보아서 안다고 하는 착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시각예술이 차라리 시각을 버린다면? 시각 이외의 감각들은 어떻게 감각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동시에 이전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어떤 감각이 차원을 거스르며 나타나줄 것이라는 기대.
  불상을 만지면서 황홀을 떠올리는 자가 있었을까? 그게 도대체 돌로써 제시되었다는 것. 시멘트로 직조하고 석필을 갈아 입혀 만든 유사바위 위에 불상의 유사피부를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돌로 감각하라는 것, 다른 것을 상상하라는 것! 심지어 장갑 안의 손끝으로 오소리의 영성(靈性)을 잡아채 보라는 것, 공간을 가로지르며 방향을 제시하거나 의지하는 지점으로서의 밧줄, 파이프, 각목, 밴드, 그물 벽, 천으로 만든 벽들의 위치, 보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그것들의 견고성. 이 작업은 밑을 알 수 없는 허공 중에 존재하며 하나의 과정이며 그냥 하나의 흐름이다. 다만 이 작업에 올라탄 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착시(錯視)가 아닌 착각(錯覺).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감각이 우연히 작용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동은 그것이 보이지 않고 오직 만져서, 맡아서, 혹은 들려서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각에서 자유로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바깥세계와 공존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사실은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고래나 여우나 바다나 산이나 이런 것들에 가까이 갈수록 인간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몰린다는 어떤 절망감이 있다. 그렇게 내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중심적인 존재에서 벗어나게 되고 내몰린 상태에서 더는 갈 곳이 없고 더는 나에게 주어진 공간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임계치에서 뒤를 돌아보면 뭔가 이제까지 같이 내몰린 존재들이 잔뜩 서있다. 혼자라도 하다 보면 같이 곁에 있게 되는 것. 그러면서 열리는 새로운 세계,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내몰리는 과정의 무너지는 것을 기록하고 여전히 목격자 속에 살아있게 하려는 시도? 미적 아나키스트의 계열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최근에 시각을 버려보고 싶었던 것은 여러 이유에서다. 중심과 바깥의 이 거리만큼 어떤 예술의 윤리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 많은 질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타자’란 어떤 존재인가? 내 의식의 세계에서 ‘타자’란 게 있기는 한 걸까? 타자에 대한 물음과 타자 없는 세계의 의미…. 사실 ‘오소리 A씨’라는 타자는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야생에 있는 존재다. 말할 수 없는 존재를 ‘대신’ 해서 말하는 것, 말 그대로 동물의 얘기를 듣고 전하는 것, 주체와 타자 사이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계속 얽혀있게 하는 어떤 것. 서로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치열한 노력, 환대, 연대, 공존, 우정,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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