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하게 하다’ 또는 ‘어리둥절하게 하다’ 정도로 번역되는 bewilder는 사실 ‘철저하게’를 뜻하는 ‘be’와 ‘길을 잃게 하거나 야생으로 유인한다’는 의미를 가진 ‘wilder’의 합성어다. 그렇다면 낯선 야생에서 철저하게 길을 잃은 모습은 어떨까? 과연 그곳엔 공포와 두려움만 존재할까?
홍이현숙 작가는 우리의 인식과 경험이 끊임없이 개념적으로 지도화되는 세상에서 일시적으로나마 과감하게 길을 잃어보는 방법으로 세계를 탐구한다. 효율적인 이동 수단과 경로, 방향을 제시하거나 뚜렷한 목적지를 설정하는 대신 작업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미지의 공간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헤매 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고래, 사자, 고양이와 같은 비인간 동물이나 나무 그 자체가 되어보기도 하고, 특정 감각을 억누르고 새로운 감각을 깨우거나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비)가시적인 교류를 시도하기도 한다. 성급히 출구를 찾아 나서는 대신, 길을 알 수 없는 수풀 속을 저벅저벅, 때론 조심스럽게 걸어 다니며 미지의 장소를 온몸으로 탐색하는 것이다. 홍이현숙은 작가노트에서 “‘본다, 이해한다, 안다’라는 간단한 동사들도 사실은 비약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실감할 수 있으므로 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취하는 자발적인 길 잃음은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믿는 신념과 어떤 대상이든 체계적으로 정리된 지도 위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그 오만함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가 잭 핼버스탐(Jack Halberstam)은 현대사회에서 길 잃음은 지식과 힘을 쟁취하는 데 불필요한 장애물로 여겨진다는 점을 지적하며, 오히려 제도화된 지식 체계와 계급적 구조를 흔드는 방식 중 하나로 생명을 다시 야생화하고(re-wild life), 자연을 다시 생각하며(rethink nature), 헤매길 자처하는(reintroduce bewilderment) 예술적 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최근 몇 년간 홍이현숙 작가는 시각적 감각에 특권을 부여하는 현대미술에 질문을 던지며 촉각, 청각, 후각 등 다른 감각들로 세상을 탐지하는 과정에 집중해 왔다. 이를테면 《오소리 A씨의 초대》(부천아트벙커, 2022)와 이후 코리아나 미술관에서 열린 《12m 아래, 종(種)들의 스펙터클》(2022)에서는 공통적으로 빛이 차단된 암흑 공간을 조성해 참여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의지하면서 미지의 장소를 탐색하도록 기획했다. 사전에 예측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공간에 놓인 사람들은 주변 환경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고 인식하는 기존 방식의 한계를 체감하게 되고, 그 합리성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경험이 퍼포먼스에 함께하는 참여자들이 일시적으로 구축한 소규모 공동체로서 공유된다는 것이다.
감각의 공유, 또는 공동의 감각은 홍이현숙의 최근 영상 작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울 북한산 승가사 계단 끝에 있는 5.94m 높이의 마애여래좌상을 목소리로 만져보는 <당신이 지금 만지는 것>(2020)에서 그는 단순히 촉각적 경험을 언어로 묘사하거나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불상을 눈으로, 또 언어로 경험해 보도록 초대한다. <당신이 지금 만지는 것 - 월출산 시루봉>(2023)의 경우, 작가는 영상 속 내러티브를 확장한 자작 시를 관객과 함께 번갈아 낭독하는 참여형 퍼포먼스를 통해 가파르게 솟아오른 시루봉을 직접 오르며 오감으로 느꼈던 바위와 생물의 존재를 함께 상기해 본다.
홍이현숙에게 상상으로 “금성까지 왕복달리기“를 가능하게 하는 자신의 집이나 작업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방은 유독 소중해 보인다. 집은 작가에게 신체의 경계, 나아가 사회 속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경계를 탐색하게끔 만드는 기폭제가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집이라는 공간은 거의 내 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달팽이의 그것처럼....마침내 내가 내 집만하게 나를 키웠을 때 막상 어디까지가 내 집인지” 그는 묻는다. 한강변을 향해 놓인 창문 사이로 빛과 어둠이 번갈아 쏟아져 들어오는 홍이현숙의 난지 레지던시 스튜디오는 일시적으로 집이자 방, 작업실로 작동하며 또 다른 경계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예를 들어 레지던시 기간 동안 구상한 신작 <버드나무가 돌아왔다>(2023)는 스튜디오 주변을 배회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난지도를 오가는 도중에 우연히 재회하게 된 한강변의 버드나무를 주제로 한다.
흥미롭게도 줄곧 ‘되기(becoming)’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가로질러 횡단했던 작가는 이번에는 멸절된 줄 알았던 버드나무가 돌아왔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추상적 이론이나 정치적 구호를 경유하지 않고 오로지 작가의 몸짓을 통해서 전해지는 ‘기쁨’이라는 감정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5년 전 버드나무의 죽음을 애도하며 치러진 홍이현숙의 첫 개인전을 떠올릴 때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버드나무 씨앗이 염증성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소문에 대응해 가로수와 강가의 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고, 작가는 당시 무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버드나무를 일부 거둬서 작업의 일환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런 나무의 부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한강 변에 다시 자라나는 어린 버드나무를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하지만 인간들이 저지른 멸종 행위에 굴하지 않고 다시 돌아온 버드나무를 향한 축하도 잠시, 영상의 마지막은 나무의 귀환을 확신하는 자신을 의심하는 논조로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맞아요. 나는 죽었어요.
당신도 알았지요.
‘돌아왔다‘는 것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
혹은 당신이 지어낸 환영
“우리는 버드나무가 돌아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작가는 복잡한 고민의 미로 속에서 해답이라는 출구를 찾아냈다고 선포하는 대신, 그 가운데 머문다. 그리고 다시 질문하고, 헤매고, 움직이길 시도하면서 버드나무로 대변되는 비인간 존재들과 그들의 세계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자 노력한다. 홍이현숙의 전작과 앞으로의 작업이 궁금해지는 이유는, 이 능동적 길 잃음의 과정에 관객인 우리도 초대받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는 발걸음을 따라가며 좌표를 벗어난 모험에서 오는 일종의 자유로움, 그 해방감과 가능성을 함께 느껴보자.
임수영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로 동아시아 근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한 연구와 국제교류 전시를 기획해 왔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2023)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아카이브 연구를 통해 조각과 퍼포먼스의 교차점을 탐구하며 서울대와 경희대에 출강하고 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런던대 코톨드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Sooyoung Leam is an art historian and curator based in Seoul. She specializes in modern and contemporary art with a particular focus on East Asia. Her ongoing research on archives explores intersections between sculpture, performance and politics. Sooyoung was one of the curators of the 14th Gwangju Biennale (2023), and she currently teach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Kyunghee University. She studied History of Art at Cambridge University and completed her PhD at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