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왜왔니,연희동 볼테르에서 영화 만들기, 2013
2011년에 ‘페경의례’전시를 하면서, 폐경한 언니들을 인터뷰한 짧은 영상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내또래 언니들과 뭔가 작업을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뭔가를 주고 받을 수 있겠다는 낌새, 일방적이거나 교육하는 관계가 아니라 같이 스며들 수 있는 관계말이다. ‘연희동에 모여서 영화보며 놀자. 동네에 뭐가 있는지 뒤지며 다니자 전시장도 다니자 공연도 보고 수다떨기로 하자 그리고 영화도 만들자’라며, 2013년 3월에 ‘연희동 볼테르’라는 거창한 제목의 모임을 만들고 무조건 여러 언니들을 초대했다. 볼테르는 세계대전때 예술가들이 스위스로 도망가서 다다이즘 같은 말도 만들어내면서 온갖 세기말적인 짓들을 했던 곳이라고 언니들에게 소개했더니 언니들이 좋다며 열광했다. 비슷하지는 못하더라도 한번 해보자며 덤벼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42분짜리의 짧지만 나름 급진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일종의 사적다큐인데 열 명의 여성들은 30대에서 60대까지의, 연희동 주변에 사는 여성들이다. 키워드는 ‘집’과 ‘자신의 정체’였는데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마주하고 이야기하느라 일 년이 지나갔다. 자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고 한다, 이야기로 부족한 것은 자신과 관련있는 사진을 수백 장씩 찍어와 그것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이 웃고 때로는 소리지르고 눈물 흘리며 리액션을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개별적인 얘기들을 독립적으로 놔두고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의 흐름을 가질 수 있도록 편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편집단계에서 하나의 난관에 봉착하였는데 한 언니가 자신이 이제까지 한 이야기를 영화에서 삭제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 언니는 사실 성인이 되고 나서 한 번도 자신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영화를 만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표도 하고 소극적이지만 자신을 촬영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않길래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편집을 하는 도중에 자신을 삭제해달라고 한 것이다. 막상 자신의 영상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언니도 얼마나 망설이고 뒤척이며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맥락상 그 언니의 편집분을 삭제하기는 정말 어려웠음으로 나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완강히 거절하였다. 시사회는 다가오고 결국 그녀와 나는 시사회 하루만 그 영화를 틀고 그 이후에, 영화에서 그녀의 부분을 삭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니까 그날의 시사회는 시사회라기 보다는, 42분짜리 영화 이후에 이어진 언니들의 자기 고백과, 그날 그 자리에 온 관객들의 공감어린 이야기들까지 , 다시 볼 수 없는 2시간짜리 공연이 됐던 것이다
이 영화의 시사회를 하던 그날, 바로 그 장소, 연희동자치회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들과 , 영화가 끝난 후 페이스북 모바일 폰 메일 등에서 주고 받은 이야기들을 정리해보았다.
서희윤(출연자): 그전에 나는 사실 세상사에 별로 관심없는 무심한 사람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는 내가 접하는 모든 사물에 조금식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어요. 저건 어떻게 찍어서 표현하면 좋을까? 저건 나랑 어떻게 연결하면 재미있을까? 아무렇게나 찍은 나의 아들사진이 영상으로 만들어지다니 정말 멋진 일이었던 것같아요.
김영숙(출연자): 올 한 해 영상작업 같이하면서, 무엇보다도 나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성주은(출연자): 사실 오늘 이야기 나온 삭제해달라는 사람이 저인데요. 저는 이 프로그램 전까지 사진찍히는 걸 무척 싫어했던 것 사실입니다. 사진 찍는 것도요. 약간 강박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도 그것을 용납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제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네요.
1.Sooyoung Lee
관계에 개입하여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는 현대미술의 큰 흐름을 홍마담의 전시에서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홍마담의 미디어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접촉이고 홍마담이 생산한 것은 인간관계의 새로운 경험들이다. 새로운 관계의 생성이 예술인 이유는, 욕망으로 '변화'의 동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갇힌 욕망으로 주어진 패턴을 깨는 일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홍마담의 작업이 '집단 감성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기대된다. 자신들의 영상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우리끼리는 괜찮은데, 타인은 안 된다, 이것인데. 내가 나 인체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소통할 수 있다면, 그 열 명의 작가들은 진짜 예술가가 되었겠지만, 이제 시작이다. 만약 이 작업이 계속된다면, 열 명의 작가들은 소통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홍마담의 작업은 최종 편집된 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희동주민자치센터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상은 장소였을 뿐이다. '영상이라는 장소'에서 소통을 거부하는 그 틈들이 더 알차게 그리고 뜨겁게 일어났다면, 연희동이 분명 카페볼테르였다는 것이 드러났을 것이다.
2.Sooyoung Lee
‘꽃처럼 바람처럼’ 작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주호의 말이 의미심장했기 때문이었는데, 가족의 허락 아래 연애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 주호는 '남편이 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정신병원에 가는 것 보다는 그게 낫기 때문에' 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 주호의 말처럼, 정신병원에 가야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관습을 어겼으므로. 아니 관습을 거부한 것을 감히 '공표'했으므로. 그러나 그는 분명 당당했고 춤을 췄고 사랑을 찬양했고 신과 놀았고 영화를 만들었다. 관습을 깨고 싱싱한 욕망으로 자유로운 삶을 생산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마지막으로. 홍마담은 '여성'에 대해 오랫동안 화두를 잡아왔다. 홍마담이 그리는 '여성'의 패턴화가 있는데, 생각을 나누고 싶다. 지금은 밥 먹고 다른 일을 해야 해서, 다음에 함 뻐꾸기를 날려 보리라.
1.박수진 Sooyoung Lee 네가 워낙 잘 잡아내서 홍마담 보여드렸더니 연희동 볼테르팀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페북과 카톡을 잇는 신공을 보여드렸다. sns의 신세계을 열어드렸지. ㅋㅋ 여성담론과 매체와 새로운 관계 형성을 열어 제낀 부분은 나 역시 훙미로운 부분이야. 뻐꾸기 같이 날려 보자. 음주와 가무를 하면서.
1.Hyunsook Hong 나한테 어떤 '여성'패턴이 있는지는 몰랐는 걸? 어쨌든 이 영화는 우리가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집'이라는 장소와 연결된 것들로 묶어본 것이니 그것에서 벗어난 얘기가 있다면 아마 빠졌겠지? 아니, 모르겠다? 이참에 '집과 가족'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어떤 얘기들이 있었는지 나머지 부분들을 뒤져봐? 사실 편집하다가 어떤 땐, 내가 편집을 한다고 잘라버린 나머지 것들로 묶는게 오히려 낫겟다 싶을 때가 있었지. 이야기의 기록들은, 한참을 지난뒤에 뒤지면 뒤질수록 낯설었고 새로웠고 어떤 것을 어떻게 건질 것인지 헤맸다. ‘편집하고 있는 나'가 빠지면 오히려 훨씬 작품에 가깝게 갈 것인데... 라는 생각도 했고. 아뭏든 열명의 작가들을 하나로 묶을 때, 가장 두툼한 레이어가 나올 수 있는 키워드가 나는 '집'이라고 보았는데 생각해보니, '집'이라는 키워드가 나에게 가장 쉬었다면, 아마 나 스스로 '집'이라는 키워드로 묶을려는 태도를 이미 그분들에게 누출했을지도?
2..Hyunsook Hong 꽃처럼 바람처럼의 작가를 주호처럼 이해하는데도 한참 걸렸어 나는. 역쉬 주호! 주호씨가 이런 작업을 하면 나보다 더 잘 하지 않을까?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언니에겐 그 너머 또 뭐가 있다는 거지. 그 모든 것이 그 언니의 선택이라는 거야 스스로 소외되고 스스로 외로워지는 거.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 스스로 타자의 위치를 선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모임에서도 그것을 견지하는 의젓함과 아름다움, . 배우고 싶은 배짱이야.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인물이고 한편으로 그래서 더 깊이 사귀고 싶은. . 내가 그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한, 알수 없는~
1.이주호 글쓰기가 늘 두려운 일인 저이기에 댓글 달기는 생각도 않고 있다가, 제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쫓아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수영이의 글을 완전히 이해는 못했다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만 홍쌤과 수영이의 이해가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리,,,
2.이주호 매년 봄에 피는 개나리지만 난 볼 때마다 혼자 큰소리로 웃습니다. 바람까지 부는 날이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노래까지 들리는 듯해서 더 크게 웃고는 합니다. 웃는 심정은 귀엽기도 하고 흐느적 흐느적 난리를 치는 모습이 그냥 웃겨서입니다. '꽃처럼 바람처럼'의 그 여인에게서 개나리가 연상된 겁니다. 수영이가 애잔함이라는 감정이입이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는 " 다홍치마에 노랑저고리는 쫌 고만~~" 하는 느낌이었을까요? 아직은 자신만만한 40대 이기에 저 여인의 감정을 공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3.Hyunsook Hong 그러게! 그것도 나는 한참 뒤에 알았지만, 사실 나 말고 한 두 사람이 조금 유보적이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호씨랑 생각이 비슷한거야. 드러내놓고 아,쫌 ! 뭐 그런거지.~ 그것이 40대라서라기 보다는 혹은 다른 세대라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궁금해. 그러니 영수언니는 그 모든 시선을 물리치고 힘겹게 자신을 말해야 했지. 힘이 두 배는 들었겠지만 씩씩하고 당당했어. 끝까지 했으니 ! 마지막 시사회 안나오실 줄 알았는데 나오셨고~ 나오셔서 자신의 분량이 너무 조금이라나? 흐흐. 그 언니가 남이 그러거나 말거나 힘겹게 자신을 표현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편집되었어(깔끔한 편집자와 나의 팔랑귀 덕분에). 아마 그런게 '틈'일 것같았는데 ~ 그런 틈들을 찾아서 나중에 혼자 조용히 편집해 봐야지~~^^.
2. 박수진:나는 아직 이름이 명명되지 않은 이 프로젝트의 기획동기와 시작점을 봤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의 어려움과 갈등 그리고 그것들을 뛰어넘는 즐거움과 재미도 봐왔다. 드디어 작품이 개봉된 날. 영상으로만 보면 이 프로젝트가 계획했던 결과물이지만 "연희동 볼테르"라 명명됐던 그날의 프로그램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또는 예상했더라도 감각하지 못했던 "살"과 "물질"의 감각으로 가득 차있었고 "생기"가 진동하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다시 말해서 말과 글로 그림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음기"와 "생기"를 느꼈다.
연희동 볼테르에서 10개월 동안의 과정 속에 "꽃"을 피우고 각각 자신에게 스스로 "꽃"으로 명명한 열 명의 마담들의 욕망은 스크린 밖으로 흘러 넘쳐 무한한 것들로 변신했다.
열 개의 영화는 누구든 짐작해볼 수 있는 우리 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들이지만, 그들이 각각의 자기 이야기와 욕망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스크린 밖에서 더 많은 변신을 꿈꾸는 욕망의 에너지들이 더 넘실거렸을 것이다. 이 욕망덩어리들이 계속 변신하는 다음 이야기들이 더 궁금하다.
안현숙: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가 시행 착오하면서 걸어가는 이야기가 주렁주렁 담겨 있는 그래서 집안에 보따리를 하나 하나 꺼내어 만들어진 사연들, 힘겹고 어려웠던 일, 재밌고 신났던 그런 저런 시간의 추억을 씹으며 아줌마들이 하여간 이렇게 모여 친구와 수다는 스스로 자가 치유가 되며~ 외로웠던 그 때 수다는 유학시절에 즐겨 했던 메뉴 중 하나가 생각나네~
Geumhong Lee 사람들을 만나는 작업은 항상 예상한 바를 넘어선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이유도, 상황도 다양하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그렇듯이 낯선 자에게 옆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 자리에 눈치껏 앉긴 했으나, 말 걸기 여간 땀나는 일이 아니다.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할라치면 또 저만치 도망가 있고, 이젠 좀 괜찮겠지 싶으면 다시금 싸늘하게 잘라 말한다. 하... 기운 빠지고, 후달리고, 작업은 터덕거리고, 뭔가 한마디라도 이야기하게 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내가 못마땅하고, 만나기 싫어지면서... 이쯤해서 나와 타협한다. 핑계거리야 많다. 홍마담은 끝까지 자기를 몰아세운다. 그래서 무림의 고수다. 师傅!!
맹정환: 연희동 아줌마들의 이 작업은 우리가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하는 제3의 인간류(남자, 여자, 아줌마) "아줌마"라는 존재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고민과 희노애락을 보고 듣고, 그리고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며 같이 즐기고픈 욕망을 선사한다. 내 이야기도 들어보시겠소!
손승현: 영화속 여성들은 자신들이 그 동안 가족을 돌보며 주춤거리고 살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삶을 솔직히 드러내며 솔직하고 때로는 당황스럽게 하면서 기분좋은 삶의 느낌을 이야기한다. 이런 새로운 관점의 접근은 긍정적으로 느껴졌고 여성들만의 감수성이자 특유의 포용력이 만든 유쾌한 이야기로 느꼈다. 예술과 삶이 겉돌지 않고 하나로 될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 반갑고 기쁘다. 내삶을 기억하기, 표현하기, 잊지 않기 이런 것이 생각났다
전명은: 나는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경험이라고 믿어왔다. 경험한 것이 아니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험보다 선행되어야할 일은 관점을 갖는 일이다. 경험과 현상은 관점을 통해 해석 되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의 구질구질한 이야기가 이토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 아줌마들의 맨얼굴이 그토록 사랑스러웠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 얼굴을 바라본 작가의 관점과 상상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원연: 그분들 하신 이야기들은 살(피부, 육체)이 느껴졌어요. 살을 섞어 애를 만들고 살을 찢어 애를 낳고 기른 자들 특유의 뭔가가 있는데 말로 표현 하기는 어려워요.
박찬국: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생활과 사회적 역할과 뻔한 욕망 안에 묶여 있을 거라는 선입견을 깨고 생활과 자기 욕망을 타자로서 들여다 보며 유희하기도 하고, 진지하게 주어진 관계에 몰입하기도 하고, 관습이나 제도를 넘어 자기를 세우며 살기도 한다. 예술적 태도나 상상이 자연스럽게 체현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영화라는 틀을 통해서 다시보기, 서로보기, 들여다 보기 그리고 상호작용과 맞장구를 통해 '아트'를 의식하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리고 아트는 (전문성으로서 아트와 관계 없이) 역시 혁명적인 거구나 ㅋㅋ
졸라 찌질한 내 또래의 남성들과 이런 얘기가 가능할까? 가능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죽을 때까지 권력관계에 매달리는 것이 수컷들이라 실제로 아트(혁명)는 어려울거고. 영화적 재미는 있을라나ㅋ
최선영: 영화 작업에 참여한 여성들이 대부분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창작 작업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을 그들이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작업을 했다는 것에 놀라웠다. 여기서 자연스럽게라는 것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바라보기. 상영에 대해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이런 시도의 당연한 과정이 아닐까. 궁금한 것은, 이 작업에 대해 참여한 여성들이 자신의 가족 혹은 친구에게 무어라 설명했을지 라는 점이다. 영화 제작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둘러대고 자신의 시간을 조용히 누릴지, 나에게도 이 작업이 이만큼 의미가 있고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적극적으로 설명을 시도할지. 그것을 다른 사람이 얼마나 이해하려 애쓸지. 참여한 여성들의 자기만족, 혹은 창작 자체가 이 작업의 목표가 아닐 것이기에, 난 그 지점이 매우 궁금하다. 사실은 참여자들이 혼자 씩 웃고 말아도 괜찮지만. 근데 같이 웃는 것조차도 힘든, 요즘의 관계들 아닌가?
하명수: 문득, 제가 홍현숙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은 저에게 작가이기 이전에 아줌마였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어요. 처음에는 선생님의 무뚝뚝한 듯한 말투에 조금 어색해 했지만 차차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사실 이십대 중반 쯤인 제 나이의 또래가 어머니 외에 선생님의 연배와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감정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사실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있는 그 진득한 화법에 익숙하지가 않죠.
그런데 연희동 볼테르를 보니 그 마음보다 더 파고 내려간 구덩이에서 꺼낸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바글바글 했어요. 헝크러진 이부자리, 아들의 뒷 모습, 값싼 장식품들, 어지러운 마루바닥, 욕설, 땐스, 하느님. 아줌마들의 이야기는 언어라기보다는 지꺼리에 가까웠고 그것을 마주하는 이들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어요. 그것은 저에게 감동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의 파문을 불러 일으켰지요… 아줌마들은 언어보다 이미지와 목소리에 강한 사람들이기에 이번 프로젝트와 참 어울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희동 볼테르를 만나 가정과 여성이라는 틀안에서 응어리졌던 아줌마들의 시적 욕망들이 녹아 흐르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아줌마들의 힘이 예술의 아방가르드 못지않게 삶의 변화를 원하는 바램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혁명을 기대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송재숙: 겨우내 한 창 오른 살에 단추가 안 잠기거나 ’쌩얼’일 때에도 지금이 딱 제일 예쁘다고 하는 엄마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는 있지만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런 진심 앞에 무심하고 의심 많은 나의 가슴이 달뜨기도 하였는데 시사회 후 작가들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시금털털한 집안사정이나 형형한 감상을 진지하게 풀어내던 언니들 앞에 그만 제일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나와 내 가족이야기를 울컥 쏟아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내 평생 실로 처음 있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맥주: 자신을 얼마만큼 열 것인지는 누구에게 말하려고 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상 안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편한, 혹은 불편한 상태의 자신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말하고 있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 사람들에게 말해졌던 것을, 외부의 이방인에게 향했을 때 생기는 이질감이 저는 반가웠습니다. 그들이 제게 열어 준 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러나 참여자들은 어떠셨을지요? 제게 문을 여는 경험을 어떻게 느끼셨을까요?
하여, 영상이라는 작업물을 둘러싼 예술적 장치들이 조금 불편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가장 가까이는, 열 명의 작가라는 호명에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작가라는 호칭에는 자신을 전시할 권리 뿐만 아니라 전시된 것에 대한 일정한 책임도 따릅니다. 하지만 참여자 모두가 자신을 즐겁게 내보이고 그 보여짐에 따른 시선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작가라는 호칭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다시 예술계의 언어로 참여자들을 읽어낸 것은 아닐까요? 저는 영상을 둘러싼 편집의 요구가, 예술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의 범주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만나야 할까요? 서로 취향도 나이도 생활 형편도 다른 여성들이 서로에게 계속해서 다가가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노력들이, 일시적일 것을 알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하려 애썼던 만남의 순간들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나요?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이 멋진 여성 공동체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이 과정들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관대하게도 자신의 시간과 공간들을 영상으로 드러내보여주었고, 그 후에도 끊임없는 고민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습니다만, 질문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아직까지 품고 있기에, 영상은 한시적이고 앞뒤 맥락을 필요로 하는 답일 뿐입니다. 그리고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아마, 홍현숙의 예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