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론]
털, 그 숨은 에너지를 찾아서
전민정


  홍현숙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개입하는 공공미술을 활발히 전개해왔다. 그 만큼 작업의 양도, 그 보여지는 양상도 다양하다. 작가는 시간과 함께 공간의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해 왔다. 본 작가론은 홍현숙의 17년간 작업 속에서 분명하게 인지되는 ‘털’을 중심으로 작품 속 사유가 어떻게 단절되고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털’은 작가의 최근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작년 대안공간 풀에서 선보인 개인전의 주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나는 이 ‘털’의 이미지가 시종일관 홍현숙의 작품 속에서 잠재되었다가 드러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본다. 또한 여기에서의 ‘털’은 피부를 무성하게 덮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표면에 균열을 일으키고 삐죽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을 이르기도 한다. 즉 털이 지닌 ‘에너지’와 ‘힘’을 포괄한다.
  이처럼 최근의 작가의 철학과 연관된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서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읽는 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작품은 그 시기 시기마다 어떤 우연성과 필연성이 동시에 작용하여 얻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털’이라는 키워드는 그러한 우연성과 필연성 모두를 읽어내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묻혀있던 기억들을 현재의 사건이나 의도로 다시 떠올리는 ‘지연된 반응’처럼, 나는 ‘털’이라는 현재진행형의 개념을 통하여 홍현숙의 지난 시기의 작품을 환기하고 새롭게 읽어내고자 한다. 즉, 순차적인 순서로 작가의 작품을 더듬기 보다는 과거의 어떤 작품과 최근 작품 사이에 지속되고 있는 어떤 ‘지점’들을 밝히려는 것이다.

fig6. 은닉된 에너지-그 여자의 욕망/ 76×116cm/ 청바지, 진주알, 금실/ 1996
털__ 중성적 공간
  홍현숙 작품에서 ‘털’과 관련된 이미지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996년 종로갤러리에서이다. 마치 무대의상을 연상시키듯 과장된 체모가 달린 남성용 청바지에는 허리부분과 바지 아랫단에 프릴이 달려있다. 이 다소 기이한 의상 <그 여자의 욕망>과 함께 설치된 것은 뼈대만 앙상히 드러나는 가구들이다. 침대나 식탁, 의자의 골격은 화려한 색 띠들로 촘촘히 감겨져 있다. 이 작품 <그 여자의 방>은 확실히 누군가를 지칭하고 만들어진 상황이지만, 무언가 ‘불완전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후에서야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게이임을 알게 된 상황에서 비롯된 이 작업은 작가가 ‘젠더’와 관련하여 고민한 흔적을 일차적으로 읽게 한다. 실제 작업에 이용된 옷들은 그 게이인 친구에게서 빌린 옷들이다. 즉, 여기에서 ‘옷’은 분명히 특정 인물을 환기시키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성적 정체성과 그녀만의 세계(방)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fig7. 은닉된 에너지 -그 여자의 방 중 부분/ 110×210×90cm/ 가구, 한복천/ 1996
  가구들은 화려한 골격을 과시하고 있지만, 있어야 할 요소들이 제거됨으로 인해서 사용이 불가능하다. 반대로 의상은 신체의 특정부위를 가려주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성기를 노출시킴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차적인 독해는 여성적인 시각의 산물로 작품을 독해할 가능성을 낳는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은 일반적인 여성주의적인 시선과는 약간 다른 차원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지는 분명 남성용이지만 재현된 성기는 오히려 여성의 것이다. 거기에다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프릴장식을 덧대어 바지는 대상이 불분명해진다. 즉, 공격적인 여성주의의 재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성 성기에 대한 혐오나 거세를 상징하는 위협적인 요소보다는 오히려 옷이 갖고 있는 성별 기능을 뒤집고 있다. 따라서 이 옷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존재를 위한 것이다. 혹은 남자이면서 여자인 중성적, 혼성적 존재를 위한 옷인 것이다. 여기에서 ‘털’은 현상적으로는 체모를 말하고 있지만, 작품은 오히려 체모를 드러냄으로써 성적 구분을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상황들은 이제 의문이 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 또한 불투명해졌다. 털은 그냥 털일 뿐, 어떠한 기능도 성격도 부여받지 못한다. 오히려 불투명함의 전조를 띠고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옷과 관련된 홍현숙의 이전 작업들을 탐색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그 여자의 욕망>에서 보여진 옷과 다른 성격,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홍현숙의 작업에서 ‘옷’은 사회적 코드로 기능하기 보다는 인간의 총체성을 의미하는 무엇으로 자리 잡고 있다. 즉, 인간이 일상적으로 입고 벗는 옷 그리하여 죽은 이후 남기게 되는 옷가지들은 분명히 그 옷의 익명적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이 사라진 후 그 ‘옷’은 일종의 껍데기로서, 존재 자체를 지칭하며 부재를 증명한다. 즉, 누적된 옷들은 집합적인 존재감을 관람자에게 안겨다준다. 마치 인간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누적된 옷들의 궤적은 오히려 시간과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기 홍현숙의 작업에서 ‘옷’들은 변형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 자체를 옷장에 개어 넣듯이 차곡차곡 정리하여 일정한 형태로 쌓아둔다. <은닉된 에너지 -운명처럼 다양한 옷들 옷들>이 거대한 제단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수천 명의 삶과 시간, 운명이 페스추리처럼 서로가 서로에 기대고 얽혀있는 상황은 엄숙함과 장엄함을 불러일으킨다. 즉, 이 거대한 옷들의 지층은 세속적인 재료를 이용하되 세속적인 경향을 탈출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육중한 덩어리로 변한 옷의 퇴적물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물질이 되어 어떤 ‘힘’을 발산시킨다. 관람객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물질이 뿜어내는 ‘힘’과 ‘에너지’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지층은 아버지의 역사이고, 남성의 역사이다. 다소 모뉴멘탈한 경향을 보이는 이 작업은 평생 옷 장사를 하신 아버지가 남긴 옷들과 어린 시절부터 옷 속에 파묻혀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환경 속에서 비롯되었다.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옷들을 작품으로 연결짓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는 아버지의 세계를 잇는 상징적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엄숙한 인간사의 지층에도 ‘털’이 자라기 시작한다. 부재의 공간, 죽음의 공간에 씨앗 하나가 떨어져 풀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잠재적인 털
  1997년 국립극장 대극장 계단을 이용한 설치작업은 홍현숙의 작업에서 하나의 기점을 긋는 작업이다. 먼저 작가의 관심이 내면으로 파고 돌 수밖에 없는 갤러리라는 공간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변수와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바깥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또한 ‘옷’이라는 소재를 공간 속에서 녹일 방법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옷에 대한 기존 사유가 조금씩 변형되고 있다.

fig9. 국립극장 대극장계단/ 1997
  국립극장 대극장은 70년대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로서 그 외양만 보아도 전형적인 권위주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홍현숙은 이 광장의 계단에 옷들을 펼쳐 놓고 계단과 계단 사이의 ‘틈’에 철심을 박아 옷들을 고정해 넣었다. 옷들은 처음에는 물결처럼 계단 위를 점령했다가 점점 계단 사이로 하나하나 스며든다. 계단 - 옷 - 계단 -옷 이라는 이러한 반복을 통한 누적형의 형태는 이후의 작업에도 뚜렷하게 보여진다. 콘크리트 계단의 딱딱함, 음침함이 옷들의 말랑말랑함과 융합되어 새로운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계단은 시선에 따라서 상이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계단의 제일 위에 서게 되면 아무런 변화도 볼 수 없다. 즉 기존의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건물을 마주보는 시점에서게 되면 계단은 마치 ‘완충제’같은 물렁물렁한 무언가가 떠받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계단을 밟게 되면 쑤욱 아래로 처질 것같은 느낌을 준다. 단순한 일루전 효과라고 보기에는 공간의 변화가 예상을 뒤엎는다. 이는 옷들이 그 공간이 갖고 있던 구조에 ‘틈’을 내고 비집고 들어가면서 생긴 효과이다. 즉, 누적되어 하나의 거대한 지층을 형성하던 옷들이 이제는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는 유연한 물질로 바뀐다. 홍현숙의 예술적 개입으로 재구조화된 이 계단은 환경 속으로 예술작품이 침투해 들어갔을때 어떠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좀 더 유연해진 이 공간은 이제 인근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산책로와 쉼터로, 노숙자에게는 안식처로, 그리고 연인들의 데이트코스, 콘서트와 야외공연이 벌어지는 문화 공간으로 접근이 가능해진다. 국립극장의 권위적 성격이 한 예술가의 예술적 재정의에 의해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공간과 환경에 개입하는 예술은 이처럼 공간 주변 사람들에게 공간에 대한 인식과 사용 패턴마저도 새롭게 제안하는 힘을 갖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엄밀한 의미의 ‘털’은 존재하지 않으나 ‘털’의 생장점을 응축하고 있는 생명체로서 옷가지들이 시멘트 계단 사이사이에 개입된다. 누적된 옷들은 이제 분절되어 환경과 균형을 이루며, 모뉴멘탈한 국립극장은 분명 다른 색깔을 띠게 된다. 의미적으로 본다면 국립극장이라는 권위적인 공간은 익명적 군중이 남긴 낡은 옷가지들의 평행선, 그리고 그 평행선 사이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우성들과 만나게 되면서 기존의 아우라를 상실하게 된다. 즉, 권위는 예술 앞에 무릎을 꿇는다.
  1999년 원서갤러리에서 선보인 작품은 지층의 일부를 네모반듯하게 칼로 잘라내어 옮긴 듯한 거대한 작품이다. 옷과 흙이 순차적으로 겹쳐지고 제일 마지막 표면 위에는 털(보리들)이 자라고 있다. 실제 갤러리 현장에서 물을 뿌려주는 행위가 첨가됨으로 인해서 이 지층은 실제적 상황처럼 연출되고 있다. 인공과 문명의 산물인 의복들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자연스럽게 흙으로 변할 것인가, 아니면 흙으로 재생되어질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인가. 표면에 자라고 있는 푸른 털들은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는 복잡한 화학적 분해과정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관련없이 표층에만 부유할 것인가. 관람객은 분무기로 털에게 물을 뿌려주면서 희망을 염원할 것인가, 아니면 단면을 통해 노출된 지층 내부의 이원적 대립 상황 - 문명과 자연의 누적-을 목격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인가. 이 작품은 화석처럼 켜켜이 박혀있는 옷가지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떠한 변형을 거칠지를 상상하게 만들고, 자연과 문명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초기의 옷들의 누적형에서 탈피하여 환경과 자연에 대한 개입과 성찰이라는 탈부계적 지형으로 전이되어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이 던져주는 자연의 ‘순환성’이 표면에서 자라고 있는 ‘털’을 통해서 가시화되고 있다고 본다. 인공물과 자연물이 겹쳐져 있는 상황에서 ‘털’이 자라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어떤 희망을 던져주고 있으며, 물을 뿌려주는 행위를 통해서 그 희망을 키우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작품의 패턴이 변형, 응용된 형태가 1999년 광화문 프로젝트에서도 보여 진다. 이제 옷들은 광화문 지하보도 내의 기둥들을 감싸듯이 층층이 감고 있다. 예의 그 ‘털’(풀)은 옷가지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형태로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한편 2004년 일산 신도시에서 벌어진 야외 전시에서 풀들은 완연하게 자신의 영역을 그리고 있다. 거대한 나선형 모양으로 텃밭들이 일구어져 있는 모양새이다. 애초에는 전시공간으로 쓰일 컨테이너들이 텃밭의 앞에 위치하여 텃밭은 나선형의 ‘길’로 기능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차후 컨테이너들이 삼삼오오 외곽으로 빠지면서 나선형의 모양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형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선형의 텃밭들은 공간 전체에서 다른 부분적인 공간들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며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일정한 ‘완충제’의 역할을 행하고 있다.
  확실히 이 시기 홍현숙의 작품 속 ‘옷’들은 초기의 의미를 탈각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전이되고 있다. 단순한 누적형의 거대한 설치작품들은 해체되어 공간에 습합, 공간을 유연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다. 거기에서 더 한층 나아가 옷들 사이사이에 난 풀들과 지층의 표면위에 난 풀들로 인하여 이제는 누적된 옷이 아닌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지층으로 탈바꿈 한 것이다. 이러한 옷더미의 의미들이 변화하게 된 데에는 ‘털’의 의미심장한 개입이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털’은 옷의 에너지와 상호관련을 맺으면서 어떤 ‘순환성’의 매개고리로서 기능한다. 털은 이제 공간 사이사이의 완충제의 역할을 하거나 틈을 비집어 들어가 그리하여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는 포자이도 하다. 옷 - 지층 - 털(풀)로 이어지는 연관고리들은 옷에서 시작된 ‘은닉된 에너지’들이 다양한 공간실험 속에서 다른 물질로 에너지가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들 간의 상호작용과 순환성이 작품의 균형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즉, ‘털’들은 자라나기 시작하였고 옷들에 숨겨진 ‘은닉된 에너지’들은 자연스럽게 털의 생성력으로 전이되고 있다.
도시 속 털
  털은 인간이 동물의 한 종임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이며, 다른 어떤 신체부위보다도 꾸준히 그것도 자생적이라는 점에서 ‘식물적’이다. 그래서 모근세포는 죽은 시체에서도 몇 개월간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즉, ‘털’은 동물성과 식물성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으며 그 자체의 생성원리로 숲을 이루기도 한다. 도시는 이러한 ‘털’이 균질한 시스템과 원리에 따라서 재배치되는 공간이다. 도시는 가로수를 심고, 오픈스페이스에서 조경을 만들고, 공원을 만듦으로써 최초의 ‘숲’에 대한 동경을 부분적으로 치유하고 있다.
애완동물은 그야말로 야생성이 탈각된 형태로 인간화된 동물이 된다. 동물의 털들은 사육되어 뽑혀 의류의 완충제로 들어가거나 통째로 코트로 변신하지만 이 또한 뿌리가 뽑힌 존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생장하지 못한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도인이 돗자리를 깔고 가로를 점령하고 있는 풍경은 기이하다기 보다는 코믹한 퍼포먼스로 여겨지게 된다. 남성들의 턱수염은 유행일 뿐 언젠가는 사라질 인위적인 장치로, 가발의 일종이나 마찬가지다. 신체와 결부된 ‘털’들은 문화적 코드로 해석될 뿐 더 이상 원시성을 지칭하지 못한다. 즉, 도시 속 털은 사라졌거나 혹은 재배치되어 그 존재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2000년 인사동 입구에 서 있던 육교는 홍현숙에 의해서 한시적으로나마 ‘동물’이 된다. 사지를 쭉 뻗고 서 있는 듯한 이 호피를 뒤집어 쓴 육교는 무생물적 존재를 ‘생물화’하려는 의도이다. 육교 위의 가로와 계단에는 붉은 색 카펫이 깔렸다. 이 카펫은 밟고 지날 때 발에 닿는 느낌이 물컹물컹하여, 마치 동물의 내장 위를 걷는 기분을 전해준다. 이러한 호피무늬가 감긴 전체 육교는 익숙한 풍경을 생경하게 만들고 곧 사라지게 될 육교라는 건조물에 대한 마지막 의식이 된다.
  낡은 육교는 아름다웠다. 생노병사의 아름다움까지도 거기 있었다. 패인 시멘트와 녹슨 철근에서 마치 관절염 걸린 비명이 들리는 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견뎌 냈을까? 녹신녹신해진 계단과 난간과 기둥의 선, 그 선은 이미 직선이 아니다. 시간은 육교의 강한 직선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고 그 거대한 덩어리를 서서히 허물어 내리고 이내 먼지로 만들 것이다. 우리가 그 육교에 피부를 만들어 준다. 가장 동물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호랑이의 가죽을 빌려온다. 그래서 육교의 가쁜 호흡을 들려주고 싶다. 육교의 숨결에 귀기울리게 하고 싶은 거다 - 작가의 기록 중에서 -
fig11. 인사동 육교설치 프로젝트/ 2000
  작가는 무생물적인 육교를 생명체로 인식한다. 실제로 육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이를 먹고 삐걱거리며 바람에 흔들리기도 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달리 낡으면 그 가치도 주목받지 못한다. 한창 동안 육교를 도심 속에 짓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육교가 고가도로와 함께 근대화, 도시화의 증거처럼 방송을 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도시정책이 바뀌면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노후한 육교는 철거의 대상이 된다. 육교의 탄생과 소멸은 모든 물질의 순환과정과 유사하다. 사지를 벌리고 서 있는 동물의 배 아래로 차들이 지나다니고 사람들은 그 위를 걷는다. 도로를 공중에서 가로지르는 육교는 사실, 자동차와 도로의 기능이 최적이 되도록 만든 장치이다. 도로부터 만든 후 그 다음 빈 여백같은 대지에 상업지, 주택가, 공원 등을 지정하여 구겨 넣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도시계획의 논리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지층은 땅의 기운이나 사람들의 자생적인 생활원리와는 무관하게 만들어지고 특정한 공간에 대한 정서나 추억, 이야기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홍현숙의 육교작업은 이러한 무감각한 도시 공간을 가로지르며, 한바탕의 축제를 만들고 있다. 무심히 지나쳤던 공간, 익명적 공간, 무생물적 공간이 육화되고, 성적인, 동물적인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 ‘호피’는 여기에서 껍데기이며 무늬로서 작용하는데, 일반적인 위장용으로 이를 이용하던 것과는 반대로 생생하게 육교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변형된 육교는 도시에서 사라진 ‘털’과 ‘순환성’을 다시 한번 제고하게 만들고 털의 원리라기보다는 털의 ‘표면’적 작용을 통해서 기존 공간인식에 충격을 준다. 육교는 사라졌지만, 홍현숙의 작업을 통해서 육교의 이미지는 새로운 차원에서 기억되고 추억될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 공간에 침투했을 때 남기게 되는 다양한 효과 중 하나인 것이다.
  이 작업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 2002년 파주 통일동산 내 전망대에 설치한 작품이다. 이 또한 전체적으로 표범무늬를 뒤집어쓴 어떤 알 수 없는 생물체가 우뚝 서 있는 정경이다. 생물체에서는 기다란 표범의 꼬리가 이어져 나와 제일 높은 전망대까지 이어지고 그 다음 전망대로 이어져서 꼬리의 한끝이 결국에는 북한으로 연결되지나 않을까 상상하게 만든다. 작가는 전망대라는 직선적이고 수직적인 견고한 형태를 부드럽고 살아있는 야생동물의 모습으로 바꿈으로써 통일이라는 엄숙한 주제 앞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조금은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으로 바꾸려고 하였다고 한다.
fig12. 통일전망대 설치 프로젝트/ 오두산 통일전망대 옥탑/문산/ 2002
  실제로 사용된 과자봉지(크라운제과 죠리퐁, 반짝이는 opp 필름 120,000개)은 멀리 북한쪽에서도 가시성을 획득하게 됨으로써, 이 작품은 두 이질적인 영역의 관람객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본다. 파주 통일동산은 통일에 대한 염원을 기리는 실향민들뿐만 아니라 파주나 일산, 수도권에서 주말여행을 가기에 적당한 거리이다. 그래서인지 통일동산 내에는 북한을 관찰해 볼 수 있는 전망대와 망원경 외에도 적당한 오락거리들이 함께 존재한다. 한 쪽에서는 통일과 실향의 비장감이 또 한쪽에서는 가볍고 키치적인 오락성이 공존하는 기형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홍현숙이 개입한 전망대는 일반인이 아닌 ‘군인’이 이용하는 전망대로 감시와 관찰 그 자체가 확장된 도구인 곳이다. 즉, 여기에서 시선의 주체는 국가기구와 동일시된다. 먼 거리에서 보이는 남과 북의 전망대는 국가기구의 상징적인 눈임과 동시에 신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력의 시선작동이 매개되는 전망대 또한 육교처럼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건조물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전망대를 다시 응시의 대상이 되도록 유도해냄으로써 관찰의 공간이 관찰당하게 된다.
이러한 홍현숙의 작업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이러한 시선-권력의 장치를 말랑말랑한 육질의 생명체로 전치시킴으로써 보이지 않았던 시선의 개념, 권력의 개념을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통일동산은 통일이라는 무겁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이행과정을 속세화시켜 버리는 장소이며 이 속에서 권력기구로 지칭될 수 있는 전망대는 홍현숙의 예술적 개입을 통해서 변형된다. ‘딱딱한’ 건조물은 촉각적이고 빛에 반사되는 ‘말랑말랑한’ 생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홍현숙의 몇몇 작업에서 옷 -지층 - 털(풀)로 이어지는 에너지의 순환과 분절과정을 목격하였다. 그리하여 누적형의 옷들이 주는 스펙터클한 면모나 부계적인 언어들이 탈부계적 언어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예시한 육교프로젝트나 통일 전망대 프로젝트에서 보이는 모습은 에너지의 순환보다는 ‘집적’의 효과가 더 드러난다. 이런 작품들은 작가가 일관된 개념을 가지고 환경 속에서 작업을 기획하였다기 보다 대개의 현장작업들이 그러하듯이 맞닥뜨린 공간에 따라 어떠한 시각적 효과를 거둘지를 판단함에 따라 결과가 조금씩 다르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함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시선으로 모든 요소들이 집중됨으로 인해서 기존의 남성적 어법을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선과 매개된 권력과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성주의의 오랜 화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선을 교란시키고, 그 지점에 새로운 여성미학을 매개하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미세한 시각화 전략이 필요하다. 전망대 프로젝트는 공간과 관련된 응시와 시선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작업은 또 하나의 판타지적인 시선으로 그 내부에 잠재해 있는 시선의 관계망을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 또한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공간은 ‘털’들에 의해서 열려짐과 동시에 닫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털_ 병리적 공간
  작년(2005년) 대안공간 풀에서 보여준 홍현숙의 작업은 씩씩하게 집을 나갔던 작가가 일과를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오랜 기간 동안 미루어 두었던 근본적인 문제들을 대거 청소하듯 풀어낸 작업들이다. 따라서 홍현숙의 외부 작업들과는 상당히 다른 어법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다.

fig13. 벽지, 선인장, 욕조/ 벽면길이 740cm/ 2005
  전시장은 4개의 영상물과 설치물로 이루어져있다. 두 벽면은 중산층의 거실 벽면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안정감이 묻어나는 벽지가 발라져 있다. 그 옆으로는 이십여 그루의 선인장(진짜 선인장) 화분이 놓여 있고 그 가운데에 조그만한 욕조가 설치되어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냉장고가 땅으로 꺼지는 듯, 혹은 땅에서 솟아나듯이 바닥에 박혀있다. 전시공간의 한 코너에는 핑크빛 천으로 누비질된 여성의 몸이 새겨진 문이 달려있다. 그 곳을 열게 되면 냉장고 안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빈 우유곽이나 물병들이 들어 있다. 영상물의 주인공은 살이 찐 펑퍼짐한 모습으로, 중년여성인 작가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데 전체 전시 공간속에서 작품들 간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는 일과 육아로 뒤범벅된 30대를 뒤로하고 아이들이 이제 제각각 집을 나가 독립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좀더 작업에 몰두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여성들을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40대 여성과 집의 관계를, 혹은 자신이 또한 그러하였던 상황을, 다른 여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보게 되면서 뒤늦게 ‘반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40대 여성은 육아의 시기도 지났고, 또 집안 살림도 적당히 숙련되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야 조금 한가해져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이 주어졌으나 지난 시간 동안 너무나 익숙해진 집과의 관계를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여성은 많지 않다. 작가는 이러한 40대 여성이 처한 상황에서 집에서 할 수 있는 ‘뻘 짓(허튼짓)’들을 기록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비디오의 여성은 육중한 몸으로 이소라의 다이어트 비디오 동작을 따라하고 있다. 근접촬영된 여성의 몸은 매끈하고 물신화된 모델의 몸매와 충돌하여 이 여성의 행동을 여성 신체의 상품화의 논리로 이끌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여성의 ‘따라 하기’는 그다지 별 신통력 없는 단순한 시간 때우기의 행위에 그친다. 욕망의 이중구조나 이미지로서의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문제보다도 40대 여성이 메워야 할 삶의 여백, 공허함에 우리는 오히려 시선을 돌려야 할지 모른다.

fig14. 체조/ 단채널비디오/02′ 04″/ 2005
  두 번째 비디오에서 예의 그 여성은 반복적인 물구나무서기를 행한다. 이 또한 누군가의 지시적 상황이 없이 돌연 행해지는, 언제 끝이 나도 별 상관이 없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별 소득없는 단순한 동작과 행위의 나열들은 40대 여성들의 일상 중 일부분을 잘라내어 채집해 놓은 것들이다.
fig15. 물구나무서기/ 단채널비디오/ 03′12″/2005
  영상 속의 주인공처럼 ‘집 안’에서 보여지는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증상은 신도시 여성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오늘날 신도시의 중년 여성들은 어떤 ‘부적응적인 적응’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도하게 운동이나 스포츠에 몰두하는 여성, 삼삼오오로 몰려다니며 부동산 재테크에 열을 올리는 여성, 필요치도 않은 머리손질을 위해 혹은 수다를 위해 미장원을 드나드는 여성, 도박에 빠져든 여성, 홈쇼핑에 중독된 여성, 교회와 구명예배에 열성인 여성, 또 남편 외의 애인 만드는 여성 등등. 이 모든 양상은 집과의 관계를 묵인 한 채 소극적으로 그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소 ‘병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자폐적, 병리적 징후를 겪고 있는 여성의 몸은 겉보기에는 마치 ‘정상적’ 으로 보이지만, 바로 가까이에 숨어 있는 병과 폭력, 고립을 감추고 있다. 즉, 다이어트 비디오를 따라는 행위, 끊임없는 물구나무서기는 몸으로 보여주는 항의인 셈인데 이는 무의식적이고, 불완전하며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다. 물론 여기에서 효과적인 언어나 주장, 정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의는 분명히 항의인 셈이다.
  때때로 집이라는 공간은 거의 나의 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달팽이의 그것처럼. 물컹거리지만 만만한 것은 아니고 온화한 것 같지만 견고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팔을 휘저으면 저만치 물러서 있다. 나는 언제고 벗어나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나에게 무지막지하게 들러붙어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죄고 있다. 결국 나는, 나를 무한대로 증식해서 집을 폭발시키기로 했다. 마침내 내가 내 집 만하게 나를 키웠을 때, 막상 어디까지가 집인지 어디가 나인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아, 결국 나는 집이라는 부동의 물체, 그뿐이었을까?
- 작가노트 중에서-

fig17. 문 위의 퀼팅/ 2005
fig16. 옆 작품의 예비작업
  작가는 집이라는 중력을 버텨내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증식시킨다. 전시장의 한 구석에 등지고 있는 여성의 신체는 이러한 증식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성의 몸이 누벼진 문은 곧 ‘냉장고’로 전이된다. 시인 황지우가 자신의 정체성을 ‘살찐 소파’에 비유하였듯이 홍현숙은 40대 여성의 정체성을 ‘냉장고’에 비유한다. 속이 텅텅 비어 있더라도 냉장고는 붙박이 마냥 한 자리에 눌러 붙어 있어야 한다. 즉 여성들은 냉장고 같은 존재이면서 곧 자신들이 ‘집’이 된다. 작가가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선인장을 그대로 가져와 놓은 설치적 상황은 중산층의 거실을 묘사하려는 의도보다는 선인장의 치유능력에 기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40대 여자의 방은 초기 <그 여자의 방>의 설치적 상황과 확연히 다르다.
초기 작업 <그 여자의 방>은 시각적으로 더 화려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완충제가 없어진 침대 메트리스처럼 집은 삐걱대고 딱딱하며 어떤 ‘기능’만 남은 공간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최근의 ‘여자의 방’에서는 여성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작은 욕조와 핑크빛 벽지, 그리고 선인장, 잘린 냉장고를 통해서 불안함과 동시에 어떤 긍정의 시선도 느껴진다. 특히 선인장은 전체적으로 공간을 건조한 분위기로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주변을 차분하게 정돈시킨다. 거기에다 선인장은 예민한 ‘털(가시)’을 발산시킴으로써 순응과는 다른 묘한 긴장감을 던져주고 있다.

털_ 여성
  여자의 피부는 일반적으로 보드라운 형태, 즉 털이 없이 매끄러워야 하며 세상살이의 흔적, 나이, 깊은 생각 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좋다. 털은 얼굴뿐만 아니라 다리와 허벅지 등 몸의 어느 부위에서 나든 간에 제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여성도 면도를 한다. 어떤 경우는 아예 악취 나는 탈모제를 바르기도 한다. 여름에는 겨드랑이의 털이 집중적인 면도의 대상이 되고, 코 밑 수염과 눈썹마저도 족집게로 뿌리째 제거된다. 유일하게 보존되고 때때로 찬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털은 머리에만 해당된다. 여성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여성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

fig18. 날개/ 단채널 비디오/ 사진2장 무한 반복영상/ 2005
  홍현숙의 마지막 두 영상물은 위와 같은 관습을 비틀고 있다. 세 번째 영상물은 중년 여성이 두 팔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데, 그러는 사이 두 겨드랑이에서 황금색 털이 쏟아져 내린다. 그 순간 여성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털은 이제 ‘날개’가 될 만큼 자라난다.
마치 초기 작품 <그 여자의 욕망>에서 바지 위에 과시적인 형태로 드러났던 ‘털’들이 여기에서는 황금색의 겨드랑이 털로 재현되고 있다. 과장된 모습은 마찬가지이지만 두 개의 털 모두 어떤 상상적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네 번째 영상물에서는 여성의 머리털이 제거되는 모습이 줌인 되어 비춰지고 있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묻어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파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머리털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준다. 털은 곧 식물로 변화며 곧 자라게 될 것처럼 느껴진다. 이 영상은 머리를 면도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보여질 정도로 줌인 상태에서 촬영된 것으로 머리가 깎이고 있는 여성이 누구인지, 그 여성의 감정 상태는 어떤지 등은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는 이 부분에서 이 머리를 깍는 행위를 어떤 ‘극적이고 정치적인 언술’로 비쳐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머리 부분만을 집중하여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즉, 작가는 여성적 저항의 메시지로 단순 독해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하여 ‘털’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시켜 보여주었다. 그 것은 마지막에 ‘물을 뿌려주는 행위’ 때문에 더 확연해진다. 즉, 이 영상물에서 ‘털’은 여성성의 상징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일련의 작품 속에서 보여진 풀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풍부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엄숙함마저 풍기는 이 마지막 영상물은 전시장의 비중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앞선 3개의 영상물과 연결되어 작가의 주된 발언이 되고 있다. 삭발이라는 행위는 여성을 ‘탈성화’시키는 행위로, ‘정상성’을 거부하는 행동이다. 집은 정상적 주부 - 그러나 병적인 징후로 나날을 보내는 -만을 인정하는 또 다른 훈육의 공간으로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묶어둔다. 즉, 여성의 몸은 가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잠재적인 욕망을 뒤로 한 채 고립, 혹은 단절된다. 여성의 몸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병리적 현상들은 이러한 훈육적 관행들에 대한 분명한 항의인 것이다.
홍현숙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온 ‘은닉된 에너지’는 줌인 된 머리털에서도 또한 증명되고 있다.
fig19. 물주기/ 단채널비디오/ 02′44″
  사소한 병리적 증후들의 아래에는 분명히 폭발적인 에너지가 숨겨져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짧은 머리털은 선인장의 가시, 그리고 그 이전에 옷가지의 누적층에서 선보였던 풀들과 유사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다. 이제 털은 지층도 특정한 구조물도 아닌 ‘여성의 몸’과 결부되어 그 에너지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듯이 보인다. 덥수룩한 머리털을 제거해야만 드러나는 분명한 ‘털’의 이미지처럼 여성의 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집과의 관계망을 드러내고 나서야 여성적인 존재감은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서 ‘털’은 여성적 정체성의 근원으로 작동하며 공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었던 예술적 에너지의 모근이기도 하다.
  홍현숙의 작품 세계는 경험에서 비롯된 공간과 환경에 대한 탐색을 시작으로 이제 예술가 자신, 여성의 정체성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쪽으로 확장되고 있다. 가끔은 상투적인 여성적 아이콘들로, 단일자적인 시각화의 방식으로 인해서 단선적인 독해의 위험을 낳기도 하지만, 일련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풀과 털의 ‘생성력’은 홍현숙이 꿈꾸는 여성주의적인 비전을 담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각적인 측면에서의 반복구조 그리고 결단력 있는 조형어법은 문제를 복잡하게 우회하지 않고 단순명쾌하게 전달하려고 한다. 작품을 설명 해줄 때 빠지지 않았던 그녀만의 그 시기에 대한 기억 - ‘이건 첫째 아이가 5살 때, 이건 둘째아이 임신했을 때 한 작업이다.’은 한 여성작가가 작업과 가정을 동시에 병행하면서 갖게 된 고유한 시간 축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스산하다고 평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이 더 끔찍하다”고 말하는데, 이 표현처럼 실제와 이미지 사이의 모순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러한 끔찍한 현실에 대해서 푸념을 늘어놓고 자기 세계로 한없이 함몰되기보다는 삭발의식처럼, 냉정한 단절 혹은 가려져있는 에너지의 모근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털’은 질긴 표면에 스스로 균열을 만들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와 같이 예술 또한 어느 시점에 균열을 만들고 그 미세한 틈사이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말라버린다. 홍현숙은 일련의 ‘털’이라는 이미지를 직접, 간접적으로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초기 옷 작업 속에 침투한 ‘털’은 옷이 지닌 에너지와 교감하기 시작하였고 어떤 때는 그 자체의 에너지를 응축하여 독립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공간에 따라서 ‘털’의 개념과 사유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물질의 ‘순환성’에 바탕을 둔 생물성이 그 의미의 근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털이 작가의 초기 화두인 은닉된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며, 예술적 창조성의 에너지이자 작가가 세상을 마주하고 그것을 예술로 풀어가는 어떤 긍정의 시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 소개]
  작가 홍현숙은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하여 작년 대안공간 풀 초대전까지 대략 17여년 동안 정력적인 작업을 펼쳐온 작가다. 초기에는 주로 미술관 내에서 ‘옷’을 소재로 존재의 부재를 전달하였으나 점차 외부 환경 속으로 개입하는 현장적인 작업을 벌여오고 있다. 홍현숙은 선험적인 이성적 기획이 아닌 경험적이고 존재적인 조건 속에서 작품의 동기를 발굴하고 소재를 이끌어내며 이를 과도한 은유로 비약시키지 않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표현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특히 작년 대안공간 풀 초대전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작가의 17년간의 작업활동 속에서 점증되어온 여성주의적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냄으로써 이후 나오게 될 작품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비평가 소개]
전민정

  성균관대학교에서 의상학, 동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졸업하였다. 2003년부터 미술인회의 공공미술분과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공공미술 기획 및 비평, 공공미술가의 네트워킹과 교육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시민사회적인 공공성보다도 특수하고 명료한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공공미술 작업과 새로운 문화생산자의 발굴에 관심을 갖고 있다. <청계미니박람회〉프로젝트 매니저, <열다섯 마을이야기> 코디네이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군산 해망동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공동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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