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發!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수행의 증거
홍이현숙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변화해 가는 자신에 대한 에피소드를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집에 왜 왔니>의 제작과정에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 ‘C發’을 종이 커다랗게 써서 함께 큰 소리로 읽는 연습을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연습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욕이 튀어나올 법한 상황에서도 홍이현숙은 그 정도 수위의 욕을 좀처럼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작가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는데, 단 5분이 늦었다는 이유로 들여보내 주질 않는 거다. 사정을 해보았지만 절대로 규칙을 어길 수 없다고 했다. 체념하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서운해 할 동료가 마음에 걸려서 다시 한 번 부탁해 보려고 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정작 돌아와서 말을 꺼내려는 데, '왜 또 왔니?' 하는 표정의 싸늘한 얼굴을 마주하자,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 C發!” 미술관엔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왠 미친 아줌마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욕을 해대다니! 하나 둘 자초지종을 묻는 시설 책임자들이 나왔고, 그녀는 결국 입장(立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그 순간 그녀가 들어간(入) 장(場)은 그 이전의 공간과는 다른 층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며 관련자들의 허가를 받아 미술관에 들어간 순간이 아니라, 연습과 훈련으로 다져진 수행이 자기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다양한 존재로 만드는가를 보여준 순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수행의 반복으로 인한 변화가 ‘자기도 모르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공공의 장소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C發’을 질러 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수행의 증거다.
통상적인 신체의 전복, ‘아줌마’를 넘어선 아줌마
언어철학자 존 L. 오스틴은 “두 분은 이제 부부가 되었습니다.”와 같은 선언적인 발화에서는 말하는 것 자체가 행위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를 수행적performative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수행은 퍼포먼스(perfprmance)의 번역어다. 퍼포먼스는 원래 연기나 공연처럼 주로 아티스트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과격하거나 파격적인 방식으로 일상을 깨는 행위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수행적인 실천performative practice은 일상을 구성하고, 어떤 행위를 반복하여 훈련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습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에 주목하여 젠더 혹은 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수행됨으로써 형성되는 수행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우리의 아이덴티티 또한 수행으로 인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홍이현숙은 ‘C發’의 사례처럼, 자신의 아이덴티티 안에 없던 어떤 것을 일상의 수행을 통해 형성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통상적으로는 열고 들어갈 수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자신이 피사체로 등장하는 여러 작품들 속에서도 그녀는 ‘아줌마’라는 일상의 위상을 전복적으로 구사한다. 통상적인 인식과 감각의 지평에서 ‘아줌마’는 주로 일상적인 삶을 사는 여성들 혹은 일상이 담겨있는 신체를 뜻하는 말이다. 사실 이 점에서 페미니즘은 아줌마의 신체와 모순적인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신체가 여성 억압의 현장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적 특이성이 페미니즘의 실천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홍이현숙은 오히려 그러한 일상을 살아내는 신체가 수행을 통해서 갖게 된 잠재적인 힘으로 예술의 공간, 퍼포먼스의 공간이 열리게 하고, 닫혀 있던 것을 뚫고 들어가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가 가진 통상성을 전복한다. 이에 주목해 본다면, 그녀는 <날개>, <폐경 폐경>, <우리집에 왜 왔니>등의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아줌마’라는 말을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뒤집어서 우리들에게 돌려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수행은 과거의 수행들의 무게와 사회적 상호작용들 양자에 의해 제한을 받으면서, 협력과 소통에 토대를 둔 일종의 공통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근대적인 사회적 신체들을 재생산하거나 개량하는 데에 한정된, 습관에 대한 실용주의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성이 다른 모든 사회적 신체들과 함께 일상적인 수행들에 의해 부단히 생산 및 재생산된다는 인식에 따른 수행의 정치적 의의는, 우리가 실용주의의 효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고 통상적인 사회적 신체들을 전복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사회적 형식들을 창안할 수 있다는 점이다.[1]
그렇다면 동네 아줌마들이 만나 자신들의 폐경과 늙어가는 신체와 그에 기반한 삶에 대한 수다를 떠는 행위는, 그것이 어떤 수다로 변화할 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통상적인 ‘아줌마’를 넘어선 아줌마가 될 수 있는지 감행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장(場)을 마련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쓸데없이’ 수다를 떤다는 조롱을 비웃어 주기라도 하듯, 그녀들이 만들어낸 공동성은 그녀 자신들을 유용성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변신시켜 <폐경폐경>의 장면들처럼 벽을 기어오르고 이 담과 저 담을 넘나들며 급기야 비상(飛上)하게 만든다.
틈입, 추방당한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는 하나의 방식
사람들의 활동은 어떤 장소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지배자들이 비판세력을 탄압할 땐 어김없이 장소를 파괴하고 그 장소로부터 누군가를 추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은 무엇으로부터도 간섭 받지 않는 장소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가좌 엘레지>에서 또다시 피사체가 되어 카메라 속으로 뛰어든 홍이현숙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명분으로 추방당한 장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삶이 남겨놓은 일상의 흔적에 머물러 있기를 자처하고 나선다. 화장실이었을 바닥 어딘가에서 혹은 샤워기가 붙어있었을 벽에서 그녀는 오줌을 누고 몸을 씻는 퍼포먼스를 통해 그곳을 살아낸 일상들을 다시 불러내고는 울퉁불퉁 경사진 땅 위에서 흔들흔들 위태롭게 물구나무를 선다.
그녀가 북가좌를 만나는 방식은 주위를 둘러보는 법이 없이 내달리는 개발지상주의자들과 지배자들에게 일종의 불편함을 안겨줄 터이다. 모든 것을 균질적이게 만들려는 끈질긴 동일화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늘 흔적으로 그러나 고집스럽게 남겨져 있기를 자처하는 얼룩처럼 말이다. 깨끗이 지워버리려는 혹은 싹 다 녹여버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얼룩은 눈에 거슬리고 불편한 혹은 불순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홍이현숙의 작업은 얼룩을 닮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 발 늦게, 그러나 뒤늦게나마 추방된 장소와 사람들의 삶에 가 닿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흔적으로나마 그 장소를, 그 사람들을 다시 조우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얼룩은 우리에게로 번져온다.
이렇듯 ‘예술과 엑티비즘 사이’의 영역은 지배자와 인민people[2]이 투쟁하고 절충하는 힘과 힘의 접점을 이루는 지대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이질적인 여러 사회관계들과 도시공간의 다양한 위상이 길항한다. 또한 바로 거기, 그 벌어진 틈새는 공식적인 문화와 통념들이 흘러나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는 장소이자, 비정치적인 행동이 정치적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는 장소이다.[3]
자크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활동이나 영역이 사실은 엄밀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말한다. 치안은 출생, 부, 능력 등에 따라 각각의 고정된 정체성 혹은 자리를 부여하는 활동으로써, 신체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 받게 만들고, 행동 양식과 존재 양식 그리고 말하기 양식까지도 규정하는 감각적인 짜임이다. 반면, 정치는 치안이라는 감각적 짜임을 끊어내고, 몫 없는 자들의 공간을 다시 짜는 일련의 행위들에 의해 작동한다. 어떤 신체를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도를 변경시키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보일 만한 자리를 갖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가시화된다. [4] 이런 점에서 <북가좌 엘레지>는 정치적이다. 그리고 홍이현숙이 공략하는 틈새는 수행의 결과로 체득한 특별한 힘, 즉 불화(不和)를 일으키는 힘을 통해 부단히 틈입(闖入)을 감행하는 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열리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미술관에서 ‘C發’을 외쳤던 그 순간, 북가좌에서 물구나무를 섰던 그 순간,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는 그 순간처럼.
‘경쾌함’, 슬픔의 수행으로 만들어진 표현의 굳은 살
수요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추모의 말들을 한지에 글로 쓴 형태로 모아, 고인이 된 전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에게 전하는 작업인 <조촐한 추모>와, 세월호 유가족이 일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연출한 <피케팅>. 이 두 작품은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상채기로 환기되는 두 가지 사건을 예술의 층위에서 다룬 작업이다. 홍이현숙은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혹은 슬픔의 무게에 압도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 두 사건을 만난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작업들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나는 그녀의 태도 혹은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폐경을 만나는 방식과 누군가의 고통을 만나는 방식은 홍이현숙의 작품들 속에서 의외의 감각, 즉 ‘경쾌함’이라는 공통된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숙연하고 무거워지기 일색인 문제들의 수용 방식에 대하여 새로운 감각의 지도(地圖)를 제안하는 이러한 ‘경쾌함’은 당사자들 혹은 피해자들과 함께 슬픔이나 고통의 바다로 구명조끼도 없이 뛰어들어 깊은 바닥까지 함께 가라앉아 본 자의 부상(浮上)하는 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피케팅>에서 그녀는 심지어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등장해서 세월호 미수습자의 인양을 주장한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지나가는 행인을 막아 서고 그와 짝을 이루어 왈츠를 추듯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 또한 이제껏 슬픔과 상실감으로 가득한 재현방식, 즉 피해자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사건 당시 그 순간 그 장소에만 묶어둠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당하고만 있는 무력한 타자로 표상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기존의 어프로치에 대해 홍이현숙은 불화를 일으키며 다른 방식으로 그들과 만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문옥주의 삶 또한 위안부로 지낸 시간들에 국한하지 않고, 그 ‘이후’의 시간들, 즉 생존자이자 표현자로서의 시간들까지 주목한다.
“우리가 가장 진하게 연결되는 것은 슬픔을 통해서다.”라는 홍이현숙의 수행적 선언은 슬픔의 연대가 슬픔에 대한 공감만으로 지탱된다는 통념을 깨는 방식일 때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념을 깨뜨리는 동력은 바로 나날의 수행을 통해 겹겹이 쌓아 왔을 슬픔의 굳은 살로 빚어진,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강도의 ‘경쾌함’이지 않을까?
*** <홍이현숙 작가전 X: 수행의 간격>에서는 총 7점의 영상작품이 전시되었으며, 네마프 기간동안 아트스페이스오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광화문 풍경>(2017)과 <조촐한 추모>(2016), <폐경 의례>(2012), <북가좌 엘레지>(2009)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1]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 등 옮김, 『다중』(세종서적, 2008년), 247~248쪽.
[2] people의 번역어인 ‘인민’은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인민’은 북한이 전유했기에 한때는 금칙어였다. 대신 한국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사실 이 말이 어쩌면 더 무시무시한 말일 지도 모른다. 국가 아래 인민을 두는 이 말은 지배 주체인 국가 없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 ‘인민’ 개념은 다시 사유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을 사실상 선거를 통한 주권의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인민이란 무엇인가』(현실문화, 2014년)185~189쪽. 이렇듯 제한적으로 파악되는 인민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배제된 존재들’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 즉 국가가 셈하는 인민과는 ‘다른 인민’을 산출하여 그 자체로 또 다른 공동체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이 ‘인민’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3] 이와사부로 코소 지음, 서울리다리티 옮김, 『유체도시를 구축하라! —건축, 예술, 이민을 통한, 움직이는 신체, 뉴욕의 생성』(갈무리, 2012), 193쪽.
[4]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도서출판 길, 2015년)p.39, 63~64.
웹진.꼼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