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 현숙, ‘돌봄’으로 삶을 말하다
이소임
냉장고원피스 차림으로 세계의 틈에 기거하는 홍이현숙(1958∼)은 우리가 쉬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들추어내는 것이 예술의 할 일이라 굳게 믿는다. 그는 작업 역시 미술사의 한 영역에 안전하게 위치되기보다 좌표 ‘사이’에 놓이길 바라는데, 1988년 처음 작업활동을 시작해 최근 《휭, 추-푸》(아르코미술관, 2021)에 이르기까지 30년이 넘는 경력 동안 미술계 시류에 휩쓸리지도, 특정한 매체나 주제에 머무르지도 않고 변화무쌍하게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와는 다르게 미술계에서 홍이현숙의 작업은 여성주의 혹은 에코페미니즘의 경향으로 한정되어 해석된 측면이 있다. 이에 필자는 여성이 아닌 어휘로 그의 활동을 읽어봄으로써 ‘적극적인’ 페미니스트와는 구분되는 그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다.
홍이현숙 작업의 지평을 조망하는 키워드를 꼽아본다면 ‘돌봄’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첫 개인전을 준비하던 1988년 봄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시기를 “뭔가가 몸속에 가득 차 숨이 턱까지 찬 느낌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뱉어내지 않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1984년 홍익대학교 조각과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직후 결혼과 함께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며 그는 ‘생명의 순환’이 숭고한 모성(母性)보다 여성의 양육(nurture), 즉 ‘돌봄노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때 느낀 갈증은 곧 작가로서의 데뷔를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부랴부랴 준비한 그의 첫 개인전 《은닉된 에너지》(일갤러리, 1988)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생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에서 출발했는데, 출품된 설치작업의 재료는 서울시가 가로수 정비사업을 진행하며 잘라낸 버드나무였다. 당시 한국사회는 88서울올림픽 개최를 목전에 앞두고 서울을 ‘올림픽도시’로 가꾸자는 모토 아래 도로, 건축물 등 도시환경을 대대적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고, 이는 재개발지역에 사는 철거민들의 시위를 등지고 무자비하게 강행되었다. 더불어 1980년대 말의 경기호황은 한국이 올림픽특수를 계기로, 당당히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게 했다. 그러나 홍이현숙은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는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의 시장논리가 생명을 돌보지 않고 마땅히 헤쳐도 되는 ‘시장 밖’의 가치로 폄훼한다고 보고, 그러한 개발논리가 은닉한 도시의 타자, 버드나무의 생명에너지를 회복해냈다.
타자를 배제하는 개발논리에 대한 홍이현숙의 비판의식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전시장 바깥으로 나가며 한층 심화되는데 장소-특정적 설치작업 《은닉된 에너지4: 옷들의 켜》(국립극장, 1998)가 그것이다. 이는 서울 남산 국립극장 건물의 계단 틈에 형형색색의 옷을 끼워 넣은 작업으로,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문화창달’ 정책 아래 이희태에 의해 설계된 국립극장은 한국건축사에서 고전적인 권위주의와 모뉴멘탈리티를 강조한 ‘근대적’ 건축물의 사례로 기술된다. 대학원생 시절 이 건물에서 무대설치 일을 하며 그 특이성에 주목했던 홍이현숙은 건물 아래에서 그것을 지탱하며 대칭감과 상승효과를 극대화시키는 33개의 계단이 대중을 위한 설계라기보다 “위압적이고 수직적”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극장 방문객 뿐 아니라 주위를 지나던 노숙자, 장애인, 택시기사 등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과 함께 이 단단한 계단의 틈을 찾고, 그것을 부드러운 옷으로 메꾸었다. 그는 기존의 건물을 다양한 타자들이 자유롭게 접근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모색함으로써 군부정권의 오래된 기념물이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와 실행체계를 해체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한편 1990년대 후반까지 홍이현숙의 초기작업에는 옷, 색동천, 레이스와 같은 소재와 바느질의 공예기법이 사용되어 주목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사회적으로 흔히 ‘여성적인 것’이라 젠더링된다는 점에서 ‘여성적 감수성’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홍이현숙이 처음 작업에 옷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일평생 의류사업을 했던 아버지의 죽음에서 기인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옷에 부여한 의미는 서구 본질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전략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옷은 수많은 사람의 땀과 숨을 간직한 것.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 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부드럽게 위로해준다. 옷은 아름답다. 옷은 하나하나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이미 누군가의 작품이다. 화려한 옷들과 회색빛 돌계단의 하모니…. 그러나 옷으로 만드는 작품은 영구적이지 못하다. 인간 목숨 70년과 내 작품의 일주일, 일시적이어서 오히려 매력적이다. 맹목적인 자본시대에 돈이 되지 않는 작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홍이현숙 인터뷰, 『월간미술』, 1998년 9월.
위의 인터뷰에서 확인되듯 작가에게 있어 옷은 단순한 일상의 사물이 아니라 그걸 입었던 사람의 삶이 기록된 영물(靈物)이자,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자본주의 사회에 파고드는 돌봄의 에너지다. 옷의 소재감이 환기하는 부드러운 특성과 다채로운 색감은 홍이현숙이 설치의 장소로 택한 회색도시에서 더 두드러지며, 야외 설치의 방법에서 기인하는 일시성은 차갑고 삭막한 풍경과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공간에 침투해 생명에너지를 전달하려는 그의 시도는 한국 미술계에 여성주의를 담론화한 결과를 이끌어냈던 대규모 여성미술 기획전 《‘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예술의 전당, 1999)으로 이어졌으며, 《청계천 폭포 프로젝트》(1999), <야생의 다리>(2000), 《통일전망대 설치 프로젝트》(2002) 등 여러 도시공간과 정치적 공간에서 지속되었다. 《은닉된 에너지5: 갤러리에 밭》(원서갤러리, 1999)에서는 옷과 흙을 교차하여 쌓고 제일 위층에는 보리씨앗을 심어 전시공간에 생태적 시간이 흐르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홍이현숙은 왜 초기부터 미술관 밖의 ‘장소’에 대해 천착했을까? 그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듯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부계사회의 구조와 논리를 해체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 출발에는 작가 개인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내가 지상에서 작업실을 갖게 된 지는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집 거실, 베란다, 남의 작업실, 공장 등 공간이 주어지면 어디서든 닥치는 대로 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저쪽 너머 어디쯤에 나만의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 난 그곳에 있는 시간이 정말 좋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는 건 아니다. 식구들이 깨기 전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실패한 적은 없다. 나는 거의 매일 새벽, 그곳을 가고 오가는 생활을 반복한다. 어떤 땐 대낮에 살짝 갔다 오기도 한다. 이 왕복달리기로, 나는 내 몸으로, 지구와 금성 사이, 그 허공에 수많은 선을 긋는다. 홍이현숙(2013), 『금성까지 왕복달리기』 서문 중
위 작가의 고백처럼, 작가이지만 가정 안에서 돌봄을 수행하는 어머니이자 아내이기도 했던 그는 오랫동안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했다. 이는 미술작품을 구상하고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특히 조각을 전공한 그에게 치명적인 물리적 한계로 작용했다. 그 대안으로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녘 하늘에, 그리고 미술관 바깥에 자신이 주체로서 바로 설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냈다. 야외에서 일시적으로 진행되었다가 사라지는 ‘설치’는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적게 받는 탁월한 작업방식이었다. 이처럼 2000년대 초까지 야외 설치를 행했던 그는 2005년경을 전후로 다시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미술인회의’에서의 대안적 활동은 그 계기가 되었다. 2003년에 출범한 이 단체는 기성 미술계의 문화정책체제에 반대하는 다양한 미술인들이 모여 발족되었는데, 여기서 ‘여성‧소수자 분과 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홍이현숙은 2004년에 전시기획자로서 회원들과 함께 《가상의 딸》(서울여성플라자, 2004)을 개최한 것이다. 2006년까지 3회에 걸쳐 개최된 이 전시의 제목에 언급된 ‘딸’은 여성의 미래를 은유하는 것으로, “여성을 화두로 미래의 삶을 진단하고 새로운 가족 형태를 실험”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는 부계사회 속 가족의 형태를 ‘제도’로서 점검하고 새로운 여성의 미래를 상상했다. 또 3회전에서 전지(全紙)에 나와 어머니, 외할머니의 이름을 붙여 쓴 관객참여형 작품 <외할머니의 이름을 기억하세요?>(2006)를 출품하며 가부장적 역사에 의해 지워진 모성적 계보를 복원하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여성들 간 생물학적 연대의 경험을 계기로 작가는 2005년경부터 작업에서 여성주체를 적극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한다. 《풀과 털》(아트 스페이스 풀, 2005)에서 작가는 처음 영상작업을 시도하는데, 작품 속 여성의 몸은 남성의 성적 판타지 대상이 아닌 다만 섭생(攝生)이 일어나는 생태적 ‘장소’로서 존재한다. <물주기>(2005)에서 삭발로 삐죽삐죽하게 잘려 쌓인 머리칼을 클로즈업하여 마치 산불로 불타 재처럼 검게 변한 숲의 전경처럼 보이게 연출했으며 <날개>(2005)와 ‘《풀과 털》 설치 예비작업’에서 여성의 체모를 감추거나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풀과 날개로 탈바꿈시켜 강조하며 풍자했다.
이처럼 홍이현숙 작업에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낸 여성으로서의 주체의식은 그가 첫째 아이를 대학에 입학시키고 어느 정도 ‘돌봄노동’의 무게를 덜어낸 2006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내면화되었다. 이후부터 진행될 그의 작업에서 주요한 도상적 기호(iconic sign)로 사용되는 ‘아줌마’가 이때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줌마를 도상적 기호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최근까지 약 15년간 진행된 거의 모든 퍼포먼스 기록형 영상작업에 주제를 초월하여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곧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필자와의 대화에서 작가는 “이전의 작업에서 여성작가로서 ‘장소’를 마련하는데 급급했다면 돌봄의 역할을 다하고 나니 비로소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부감(俯瞰)할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즉 작가는 이때부터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르기>(2006)에서 작가는 처음 냉장고원피스를 입고 등장해, 몸을 둥글게 말고 노란 장판이 깔린 안방의 가장자리를 빙글빙글 구른다. 이 시기 작업에는 ‘노란 장판’으로 단조롭게 표현된 집과 방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며 아줌마는 이 아늑하지 않은 공간에 갇힌 존재로 표현되거나 동일시 되곤 한다. 한국의 ‘이상적인’ 가정상(家庭像)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가족을 돌보아 온 아줌마는 이제 그 돌봄의 역할을 다 한 채로 경제‧사회 공동체의 가장자리로, 그 무관심의 지대로 비켜선 자다.
작가는 여성이 아줌마가 되어 겪는 완경을 작업의 중심화두로 가져오기도 했는데, ‘폐경, 폐경’ 시리즈가 그것이다. 그는 부계사회에 의해 구축된 외부의 시선과 그것을 내면화한 여성 자신에 의해 부정적인 개념으로 상징되어 불리는, 완경의 다른 말 ‘폐경’을 작업의 제목에서 당당히 언급했다. 그리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의해 여성에게 부여되는 ‘여성성’과, 이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을 마치 여성성을 상실하는 경험으로 상정하는 사회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 대안으로 작가는 완경을 ‘경계를 무너뜨리는’ 경험이라 선언했는데, <폐경, 폐경1>(2013)에서 축지법을 연마한 아줌마는 지붕 위를 넘어다니고, 남의 집 담을 훌쩍 뛰어올라 다양한 경계를 넘나든다. 축지법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히 초인(超人)이 되려는 엉뚱한 시도가 아니라 “균질한 공간에 대해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창출하는” 해체의 방법론에 가깝다. 그 무엇으로도 정체화되지 않은 경계인으로서의 아줌마는 <우리집에 왜왔니>(2013), <백령도>(2014), <손 팻말 시위(피케팅)(2016)에서 확인되듯 한국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여러 현장에 출몰하여 다양한 계층에 속한 ‘타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살펴본 바와 같이 돌봄과 생명의 순환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출발한 홍이현숙의 초기작업은 장소-특정적 설치를 통해 자신만의 대안적 ‘장소’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화이트큐브 바깥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낼 수 있었다. 또 스스로 가정 안에서 돌봄노동의 짐을 덜어냈다고 느낀 2000년대 중엽부터 영상작업을 시도하며, 비로소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홍이현숙의 작업은 어떠한 이즘을 추구하기보다 작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상황과 긴밀하게 관계하며 진행되어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여성주의로 읽히는 이유는 그가 추구한 방법이 배타적이기보다 상호보완적이며 포용적인 까닭이다. 돌봄은 소외되고 착취된 타자 모두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의 노동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수행해야 할 실천이다. 홍이현숙은 점차 돌봄의 대상을 전지구적 영역으로 확장시키는데, 구제역 파동과 몽골 노마딕 레지던시를 경험한 2011년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도나 해러웨이(Donna Jeanne Haraway)의 생물학과 동물권을 공부하고, 비(非)인간 개념을 작업의 화두로 삼으며 여전히 세계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작업에 담아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 집단에 머무르지 않으며, 주류 타자의 범주에도 속하지 못하는 또 다른 비주류 타자들로 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홍이현숙은 돌보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와 제한된 페미니즘 미술 사이를 오가며, 그것들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소임(1988-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現 서울시립미술관 수집연구과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