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남고비 초원. 산도 강도 없는 이곳은 구름 낀 하늘과 푸른 초원으로 양분된다.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곧은 지평선이 아득하다. 그리고 세찬 바람 소리만이 가득하다. 허술한 양산을 쓴 홍이현숙의 뒷모습이 보인다. 주로 집에서 입는 편한 원피스 차림이다. 그가 하늘과 대지의 경계를 향해 더벅더벅 걸어간다. 점점 작아지는 작가의 뒷모습이 까마득한 지평선 속으로 사라진다. 세찬 바람 소리는 내내 멎지 않는다.
이것이 홍이현숙의 비디오 작업 〈몽골에서 사라지기〉(2011)가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작업은 마치 무언의 선언과 같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대지의 바람 소리로 낭독되는 선언. 무언가를 힘주어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든 집요하게 바라보고 듣겠다는 선언. 그런가 하면 같은 해에 홍이현숙은 폐경을 겪는다. 이때 폐경이란 물론 여성의 월경이 없어지는 것(閉經)을 뜻하지만, 작가에게 폐경은 또한 경계를 폐하는 것(廢境)으로 여겨진다. 홍이현숙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이즈음 그는 온갖 경계를 무너뜨려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 이듬해인 2012년에 열린 개인전 《폐경의례》에서 선보인 비디오 작업을 보면, 몽골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원피스 차림의 홍이현숙이 축지법을 익혀 남의 집 높은 담벼락을 기어올라 노닐고, 지붕과 지붕 사이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고, 위험천만해 보이는 내부순환로의 철제 사다리에 오른다. 주택의 드높은 담장, 맨몸으로 가닿기 힘든 아찔한 고가 도로, 드넓은 초원의 아득한 지평선이 작가에게는 모두 폐경(廢境)이나 월경(越境)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홍이현숙은 때로는 축지법으로 삽시간에, 때로는 더벅더벅 느릿하게 경계를 넘어 사라진다. 이것은 작가가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의례이며, 또 다른 존재의 몸짓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듣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이런 의례와 선언은 어떤 역설로 이어진다. 경계를 넘어 사라진 홍이현숙은 비디오 이미지 속에서 어떻게 (다시) 출현할 수 있는가? 이제 이미지의 프레임 안에서 작가는 부재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저 멀리 지평선에 맞닿은 저편의 문을 열고 작가는 이편에서 영영 퇴장하고 만 것인가? 그가 축지법을 구사하며 훌쩍 뛰어넘은 경계들에는 이미지의 프레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이제 홍이현숙은 오로지 외화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2012년의 《폐경의례》 이후에 홍이현숙은 〈우리집에 왜 왔니〉(2013)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상영회를 갖는다. 이 작업에서는 연희동 주변에 사는 30대에서 60대까지의 여성들이 새삼 자신의 삶과 내면을 마주하며 이를 사진과 이야기로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정작 홍이현숙은 화면의 바깥으로 물러나 있다.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 작가는 이제 스스로 무언가를 말하고 제시하기보다는 자기 근방의 ‘언니들’의 몸짓과 이야기를 관찰하고 청취하는 역할을 떠맡은 것만 같다. 하지만 하나의 문을 닫으며 사라지는 작가는, 이편에서 퇴장하는 셈이지만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문을 열고 저편으로 입장한다. 작가는 다시금 이미지 속으로 들어온다. 다시 카메라 앞으로 나선 작가는 예전의 작가와 동일한 인물인가? 작가가 감각하는 세계는 예전의 세계와 동일한 시공간인가? 경계를 무너뜨리고 프레임 안으로 귀환한 작가는 여전히 같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다른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귀환한 세계는 여전히 같은 시공간이지만 동시에 다르게 감각되는 환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설적 조건이 2013년 이래로 홍이현숙이 보여준 비디오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일 수 있다.
〈백령도〉(2014)는 남북 분단의 최전선에 위치한 백령도에서 진행한 섬 주민들의 인터뷰와 홍이현숙이 섬을 순례하고 춤추는 모습을 담은 2채널 비디오 작업이다. 동족 간의 전쟁과 분단의 기억을 간직한 노년의 주민들이 이야기를 전할 때, 작가는 프레임 밖에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개개인의 증언을 주의 깊게 듣는다. 그런데 이 작업의 군데군데에서 우리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작가의 모습을 본다. 예전 작업에서 수차례 봤던 원피스를 입은 작가가 섬의 바닷가와 들판 및 수풀을 비롯해 군용품 상점, 현충일 기념 행사장, 병원 등을 돌아다닌다. 섬의 곳곳을 배회하는 작가는 마치 천사나 유령과도 같다. 그가 섬의 할머니들 곁에 앉아 있거나 나란히 걸을 때 할머니는 작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군용품 상점에 들어선 군인은 상점 안을 거니는 작가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우리집에 왜 왔니〉에서처럼 〈백령도〉에서도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그가 보고 듣는 섬사람들이지만, 〈우리집에 왜 왔니〉와는 달리 〈백령도〉에서 작가는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는 여전히 같은 인물이지만 다른 인물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과거의 존재, 망각의 대상, 투명하고 텅 빈 기표가 되어 프레임 안으로 귀환한다. 백령도 주민 몇몇이 이 작업 속에서 직접 자신의 기억을 증언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분단의 역사 속에서 스러진 더 많은 개개인은 영원히 망각되고 부정될 위험에 처해 있다. 홍이현숙은 이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선 이들을 대신하는 기표가 되어 섬의 이곳저곳을 떠돈다. 그리고 백령병원 현관의 처마 위에 올라 조촐한 추모의 제의를 홀로 주재한다.
〈피케팅〉(2016)에서도 예의 그 옷차림의 홍이현숙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인파가 많은 건널목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피켓에는 세월호에서 수습되지 않은 여학생을 상기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번잡한 거리의 분주한 시민들에게 작가와 피켓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피켓을 든 여성과 부딪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최근의 참사에 대한 내용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외면하고 망각하는 사람들에게 참사의 희생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이다. 홍이현숙은 행인 중 남성 한 명의 길목을 집요하게 가로막고 그의 시선에 피켓을 끈질기게 갖다 댄다. 침묵의 실랑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리고 작가와 행인이 함께 춤을 춘다. 상호적인 호의의 제스처처럼 보이는 춤사위를 이어 가는 와중에도 행인은 기어코 작가와 피켓을 외면하며 결국엔 눈앞의 존재를 밀치고 제 갈 길을 간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피켓의 내용이 모자이크 처리된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버전이다. 그러나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기억하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두 버전의 작품은 차이가 없다. 그들에게는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은 피켓도 보이지 않고 읽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는 이렇게 부정되고 망각된다. 역사의 외화면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홍이현숙은 그 외화면의 존재들을 자기 작업의 프레임 안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스스로 외화면의 존재가 되어 귀환한다.
이것은 어떤 기이한 변신의 이야기이다. 홍이현숙은 예전부터 우리가 알던 그 작가이지만, 경계를 폐하고 되돌아온 비디오 이미지 속에서 홍이현숙은 변신을 겪은 존재로서 등장한다. 그는 외화면의 존재로 변신하여 스크린으로 귀환한다. 이때 외화면의 존재가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참사의 틈바구니에서 잊히고 소외된 희생자와 피해자다.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폐한 작가는 역사의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어 이미지 안을 떠돈다. 홍이현숙의 변신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맥락뿐만 아니라 또한 생태적 맥락에서도 외화면의 존재로 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류가 근대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눈부신 기술 혁명과 산업 확장을 거듭하는 가운데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과 환경 전체는 타자화되어 인간이 마냥 착취할 수 있는 한낱 대상이나 부품으로 취급되었다. 근대적 기술의 세계관 내에서 동식물과 광물 등 비인간 일체는 인간 주체와 진정한 의미에서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외화면의 존재들로 여겨졌다. 이런 비좁은 인식의 문을 닫고 또 하나의 문을 열어 사라진 홍이현숙은 비인간과 소통을 꾀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폐하는 존재로 변신하여 이미지의 프레임으로 복귀한다.
〈수행일지—사자자세(하부양생전)〉(2016)(이하 〈사자자세〉)는 홍이현숙이 집안에서, 천변에서, 산속에서 요가의 사자자세를 취하고 포효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단채널 비디오 작업이다. 여기서 작가의 몸은 하나의 통로, 하나의 매체이다. 사자는 자원으로 포섭되지 않는 자연, 인간이 길들이고 착취할 수 없는 근원적 자연을 환유한다. 작가는 이 비인간적인 존재의 몸짓과 언어를 관찰하고 청취하려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매체로 내어주어 그것을 전달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종(種)과 종(種)의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진 홍이현숙은 사자를 대상화하기보다는 스스로 사자가 되어 보고자 한다. 이것은 비인간적 존재를 보고 듣고 이해하기 위한 가장 섬세하고 성실한 기예이다.
홍이현숙의 ‘동물-되기’는 그의 또 다른 작업 〈수행일지—고래자세〉(2018)(이하 〈고래자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에게 인간의 언어와 고래의 소리라는 이분법은 축지법으로 단숨에 횡단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경계일 뿐이다. 모든 경계의 저편에서 무엇이든 집요하게 바라보고 듣기로 결심한 작가답게 홍이현숙은 고래의 소리를 소음이 아닌 언어로 이해하고자 애쓴다. 그런 까닭에 고래의 소리를 가장 신중하게 청취하고 들은 그대로 받아쓴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쓴 고래의 발성을 꾸준히 실습함으로써 스스로 고래가 되고자 한다. 이런 ‘동물-되기’는 모방이 아니라 환대로 간주되어야 한다. 모방이 이해 가능한 무언가를 흉내 내는 활동이라면, 환대는 이해의 여부와 상관없이 타자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신체와 인식 속으로 받아들이는 실천이다. 홍이현숙은 어떠한 사전적인 이해도 전제하지 않은 채 동물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동물이 되고자 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체하며 귀환한 홍이현숙은 하나의 역설로 존재한다. 그가 〈한낮의 승가사〉(2019)에서 명시적으로 밝히듯이 그는 “사람과 비슷하지만 딱히 사람은 아닌… 왼갖 잡것들의 향연”으로서 귀환한 것이다. 그는 화면 안의 외화면이다. 그는 하나이자 여럿인 이미지이다. 아마도 이런 역설과 변신을 통해서만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환대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석광사 근방〉(2020)은 이런 환대의 과정이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된 작업이다. 은평구 갈현동의 작은 사찰인 석광사 근방은 재개발이 예정된 지역이며 많은 길고양이가 서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재개발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정 결정에 따라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 고양이들은 다수의 인간에게는 인식의 스크린 바깥으로 내몰린 외화면의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홍이현숙은 그들을 이미지의 프레임 안으로 초대한다. 작가는 그들을 임의의 기준에 따라 규정하고 처분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다만 지그시 바라보고 교감하고 소통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스스로 고양이가 되어 가고 마침내 상호적인 환대의 순간을 나누게 된다. 그는 몸을 낮춰 고양이의 시선으로 고양이와 마주하고,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네 발로 걷고 바닥을 뒹굴며, 고양이를 따라 지붕 위로 옮겨 다닌다. 이렇게 그가 자기의 몸을 고양이에게 내어주자 어느 순간 고양이들도 자기의 몸을 작가에게 내어준다. 이 상호 환대의 장면은 매우 덤덤한 방식으로 제시되지만, 인간과 비인간이 공유하는 서로의 ‘근방’에서 함께 변신하며 겹치게 되는, 새삼 놀라운 사건이기도 하다.
생태적인 관점에서 비인간 존재들을 다루는 홍이현숙의 비디오 작업과 관련하여 쇼트의 스케일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작업들에서 선택된 쇼트의 스케일 중에서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전적으로 비인간적인 시점의 쇼트들이다. 먼저, 그의 작업들에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느닷없이 등장하곤 한다. 〈사자자세〉와 〈고래자세〉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작가의 입속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작가의 입술과 치아, 혀의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이 화면들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매우 비인간적인 시점의 쇼트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으로, 창공에서 부감으로 촬영된 장면들 역시 비인간적인 시점의 쇼트들이다. 〈석광사 근방〉의 후반부에 이 지역을 부감으로 훑는 쇼트가 등장하며, 작가가 가면을 쓰고 비인간 존재의 몸짓으로 경기도미술관 외부를 한 바퀴 돌아보는 장면을 담은 〈외출〉(2022)도 경기도미술관과 그 주변부를 수직의 부감으로 보여준다. 이 두 종류의 비인간적인 시점의 쇼트 중에서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작가의 신체를 파편화, 분자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동물-되기’는 인간 주체의 통일성을 해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거울 단계’ 이전의 신체, 즉 거울에 비친 자아의 이미지를 통해 주체의 동일성을 획득하기 이전의 파편화된 신체로 되돌아가 비인간적 존재로 재구축되는 과정이 곧 ‘동물-되기’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시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수직적인 부감 쇼트 역시 인간 중심적인 시각의 정반대 편에 놓인 장면으로 보인다. 창공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본 새의 시점에서 인간의 위치는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기는커녕 매우 하찮고 미비한 개체의 자리일 뿐이다. 이와 같이 홍이현숙은 클로즈업을 통해 미시적인 차원에서 근대적 인간 주체를 해체하고, 부감 쇼트를 통해 거시적인 차원에서 인간중심적 사고를 해체한다.
비인간적인 시점의 쇼트는 인간의 시각 자체에 대한 상대화로 이어진다. 모더니티의 특권적 감각인 시각은 보는 주체로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고, 그 외의 존재들을 보이는 대 상으로서 타자화했다. 시각이 근대적인 인식의 프레임을 지배한 감각이라고 한다면, 그 외의 감각들은 그 프레임의 바깥으로 밀려난 감각들이었던 셈이다. 홍이현숙은 『월간미술』 2022년 2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시각예술이 차라리 시각을 버린다면… 시각 이외의 감각들은 어떻게 감각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그가 공식적인 역사의 외화면으로 밀려난 개개인의 고통과 기억을 이미지로 소환했듯이, 또한 인간중심주의의 외화면으로 물러난 비인간 존재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스스로의 신체를 변신시켰듯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시각중심주의의 외화면으로 내몰린 여타의 감각들을 작업의 프레임 속으로 불러온다.
〈여덟 마리 등대〉(2020)는 어두운 전시 공간을 여덟 종의 고래가 내는 소리로 채운 설치 작업이다. 아득한 몽골의 지평선으로부터 귀환한 홍이현숙이 그러한 것처럼, 이곳에서 우리도 역시 무언가를 주장하기보다는 고래의 언어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조명이 아닌 소리로 방향을 일러주는 ‘등대’의 메시지를 눈이 아닌 귀로 받아들여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 홍이현숙은 촉각을 이미지 안으로 소환하여 각각 2019년과 2023년에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이라는 동명의 비디오 작업 두 편을 선보인다. 2019년 작업은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불을 클로즈업으로 훑는 영상과 함께 작가가 보이스오버로 불상 표면의 촉감을 자세하고 위트 있게 설명한다. 클로즈업은 우리가 마애불을 시각적으로 온전히 파악하는 것을 차단한다. 작가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에게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여 볼 것을 권한다. 2023년 작업은 전남 월출산 시루봉을 오르는 클라이머의 시점으로 바위의 표면을 보여주며 자막으로 그 질감을 묘사한다. 이 작업의 쇼트는 바위에 매달린 클라이머의 시점 쇼트이지만, 이것은 인간적 시점이라기보다는 클라이머의 손과 바위의 표면이 서로 접촉하는 사건의 클로즈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홍이현숙은 그의 첫 번째 개인전 《은닉된 에너지》(1988)에서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전부 베어버린 버드나무를 애도하는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버드나무 씨앗이 염증성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주장 때문에 하루아침에 버드나무가 모조리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35년 후, 작가는 한강 변과 을숙도에 울창하게 자라난 버드나무들을 마주치고 버드나무의 귀환에 대한 2채널 비디오 작업 〈버드나무가 돌아왔다〉(2023)를 제작한다. 작가의 홈페이지에는 버드나무의 귀환에 대한 신화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세상에 남아 있던 유일한 버드나무 씨앗이 어렵사리 싹을 틔웠지만 아기 물새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싹이 튼 씨앗을 먹어 버린다. 그러자 아기 물새의 몸이 부풀어 오르고 결국에 수천 개의 버드나무 씨앗을 토해내어 온 사방에 버드나무가 퍼진다는 이야기다. 사라진 버드나무가 기어이 돌아오듯이, 저 멀리 지평선으로 사라졌던 홍이현숙도 그의 비디오 작업 속으로 귀환한다. 아기 물새의 배 속을 경유해 귀환한 버드나무처럼 홍이현숙도 또 하나의 문을 통해 외화면의 세계를 경유해 다시 이미지 속으로 귀환한다. 버드나무의 귀환으로 많은 철새들과 짐승들이 강변으로 다시 모여든 것처럼, 작업의 프레임 안으로 귀환한 홍이현숙도 여러 층위의 외화면의 존재들을 그의 이미지 속으로 불러들인다. 또는 외화면의 존재들로 그의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 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