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부처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천주교 세례명으로 받고, 신을 발음할 수 있기 전부터 성당에 나가야 했던 나에게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20대 이후로는 더 이상 성당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여차저차 집안 환경도 그랬고, 전공도 영어문학과 서양미술을 했다 보니, 기독교 세계관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살아 왔다. 불교에 대해서는 기독교만큼 잘 알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도 만물의 연결과 깨달음을 얘기하는 불교 철학에는 늘 관심이 있었다. 흥미를 느꼈다고 하나, 막상 불교 경전은 표지도 펼쳐본 적도 없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불교에 관한 책이라고는 불교 미술서와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은 것이 전부다. 깊이 알지도 못하는데 굳이 부처를 쓰려고 하는 이유는 최근에 본 두 작업에서 부처를 발견하고 덜컥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내가 본 부처는 홍이현숙 작가(b.1958)가 페이스 갤러리에서 열렸던 4인전 ‘Your Present 당신의 현재’에서 걸었던 비디오 작업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2020)과 권용주 작가(b,1977)가 아마도예술공간에서의 개인전 ‘포털 Portal’에서 선보였던 신작 <시무외 여원인>(2022)이다.
 
  홍이현숙의 <당신이 지금 만지는 것>은 작가가 북한산 승가사 마애불을 만지며 그것의 형태와 촉감에 대해 설명을 하는 비디오 작업이다. 작가는 영상의 초반에만 잠깐 전체 불상을 다 보여주고, 이후에는 내내 자신의 손이 닿은 불상의 일부분만 조명한다. 세계가 전체에서 작은 일부로 ‘확장’되면서, 불상 주변의 소리는 작가가 말하는 우주로 뒤덮인다. 마애불의 미간과 인중, 잘 다듬어진 손톱 뿐 아니라 연꽃 좌대 위에 늘어진 옷 주름 하나하나가 작가의 긴 호흡 안에서 섬세하게 이어진다. 코끼리의 전체를 보지 않고 신체 일부만 더듬으며 코끼리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매함을 비웃는 비유지만, 불상의 일부를 쓰다듬는 홍이현숙의 움직임에는 우매함 대신 충만함만이 넘친다. 작은 것으로부터 전체의 연결을 보는 부처의 가르침이 깨달음이 되어 흐르고, 부처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작가의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 마다 깊은 수행의 마음이 비친다.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은 홍이현숙이 2020년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었던 개인전 ‘휭, 추-푸’에서 발표한 작업이다. 전시 제목의 ‘휭’은 바람에 무언가 날리는 소리고, ‘추푸’는 어딘가에 동물이 부딪히는 소리라고 한다. 작가는 전시 제목에 의미가 아닌, 동작이나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간 중심의 이성적 언어와 질서를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전시장 안에는 작가의 방과 같은 크기의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관객이 올라갈 수 있는 이 작품의 제목은 <8마리의 등대>다. 사방이 어두운 공간 안에서 혼자 망망대해의 뗏목처럼 떠있는 작업 위에 누워 어둠 속을 천천히 유영하다보면, 낯선 동물의 소리가 들린다. 홍이현숙은 구조물과 함께 8개의 스피커에 8종의 고래 소리를 담아 틀었다. 커다란 생명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얼마나 작고 희미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작은 방에서 큰 고래와 더 큰 우주를 꿈꾸는 작가의 넓은 마음이 뭉클하다.
 
  ‘휭, 추-푸’에서 선 보인 또 다른 작업, <석광사 근방>은 작가가 재개발 구역인 은평구 갈현동 석광사 주변의 길고양이들과 교감하며 찍은 비디오 작업이다. 석광사는 산신과 호랑이를 모시는 산신각이다. 빈 집이 점점 늘어가는 쓸쓸한 동네에서 홍이현숙은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들과 어울린다. 작가는 동네가 없어지면 갈 곳을 잃을 길고양이들과 연신 눈을 맞추며 친밀함을 전한다. 길고양이들이 모여 있는 낡은 잿빛 지붕 위를 네 발로 기어 다니며, 가장 작고 연약한 존재들 옆에 머문다. 석광사 산신이 허름한 뒷골목의 고양이들의 눈에 반사되어 작가의 마음에 내린다. <석광사 근방>과 <8마리 등대>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교감을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에서 불상을 쓰다듬는 손끝으로 옮겨와 깊고 따뜻한 울림을 만든다.
  내가 만난 또 다른 부처는 권용주의 <시무외 여원인>(2022)이다. 시무외 여원인>은 세탁소에서 공짜로 주는 하얀 철제 옷걸이에 부엌에서 흔히 쓰는 밝은 색 고무장갑 두 짝이 무심한 듯 걸려 있는 형상을 한설치 작업이다. 소소한 사물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헐렁함이 진작 즐거운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무장갑이 부처의 손의 형태인 (수인手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다. 시무외여원인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바깥쪽으로 보이게 피고, 왼손을 내려 역시 손바닥을 보여주는 형태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라는 뜻이다. 우리 곁으로 내려온 부처의 음성이 몹시 온화하다.
 
  같은 전시에서 권용주가 감아서 회색 콘크리트 벽에 무심하게 기대어 놓은 파라솔(<파라솔>(2022)이나 페인트 통에 시멘트를 부어 굳힌 설치(<포털>(2022)도 낯설지 않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봤고, 옆 골목 주차금지 표지물로 만났던 그 형태다. 철공소에서 쓰는 H빔 기둥에 얌전히 슬링벨트를 올려놓은 작업이 <슬링벨트 1-3, 2-4>(22)나 철대에 노끈을 느슨하게 묶어 놓은 <노끈>(2022) 작업 역시, 비슷한 느낌으로 생활 반경 안에서 마주쳤던 풍경들이다. 작가는 미술관 밖에서 발견한 사물들을 안료를 입힌 석고로 캐스팅하여 전시장 안으로 가져 왔다. 이 사물들은 전시장 안에서 미술 작품이 되어, 미술이 아니었던 원래의 일상적 순간을 다시 불러낸다. 작업들 사이로 골목의 소음이 묻어나고, 철공소의 땀내가 스민다. 권용주의 조각들은 미술과 미술이 아닌 순간 사이를 왕복하면서. 전시장 안과 밖을 연결하는 ‘포털’(차원 이동)의 문을 만들어 낸다. 같은 사물에서 다른 두 개의 차원을 열어 예술과 삶 사이에 통로를 터준다. 하얀 벽으로 닫혀있는 미술관에서 벗어나 뒷골목과 철공소로, 그리고 산업현장으로, 그렇게 사람들의 삶 속으로 좀 더 가깝게 들어가고 싶어 하는 작가의 고민이 깊다.

  삶의 안쪽과 바깥쪽(명상이나 예술)을 합쳐 보는 자는 헤르만 헤세의 <싯타르타>에도 등장한다. 헤세가 해석한 불교 철학을 담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 싯다르타는 석가모니와 성만 같다. 소설 속 싯타르타는 단식과 명상, 그리고 배움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확신하며, 수행자들의 무리를 벗어나 속세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매춘부와 사랑도 하고 사업을 해서 돈도 벌어 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세상의 단일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고귀한 수행과 사바세계(속세)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사람의 마음이 강물의 뜻과 합쳐진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다른 존재를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권용주 개인전에 높이 걸려 있는 훌라우프(<포털 (2022)>는 작가의 집 앞 공터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훌라우프의 모양새를 따라 설치한 작품이다. 싯타르타가 깨달은 단일성의 원리 – 우주연결의 원리처럼 동그란 훌라우프의 차원의 문 앞에서, 나는 삶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권용주의 마음과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하게 보는 홍이현숙의 마음을 동시에 읽는다. 부처님의 둥근 손바닥을 본 것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분이다.
 
  오래된 절이나 절터를 보러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득한 고찰들 중에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를 특히 애정 한다. 운주사는 일단 절 입구부터 사나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천왕상이 없어서 문턱이 낮다는 인상을 주는 절이다. 원래 운주사에는 석탑과 석불이 각각 천 개씩 있었다고 하는데, 전란을 수 없이 겪은 주민들이 탑과 불상을 헐어다가 묘지 상석, 축대, 주춧돌로 쓰는 바람에 지금은 석탑 12개와 석불 70여개만 남은 상태라고 한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절 곳곳에는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석탑과 불상이 여전히 많다. 석탑들은 대부분 자연적인 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세워졌는데, 제대로 각이 잡힌 형식이 아니라 자유롭고 거친 모양을 지니고 있다. 그 수수한 외양 때문인지, 운주사의 탑들은 ‘동냥치탑’, ‘거지탑’이라고도 불렸다. 석탑 주변에 흩어져 있는 표정과 크기가 모두 다른 불상들은 중생들의 꾸밈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불상들은 대부분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권인의 뜻은 부처와 중생이 들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라고 한다. 절 입구부터 석탑과 석불까지, 운주사의 모든 것이 낮은 자세로 사람들 곁에 내려와 있다

  운주사의 백미는 칠성바위 근처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나란히 누워 있는 두 개의 와형석조여래불이다. 두 부처가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근사한 설화가 붙어 있는 석불이다. 사찰이 전체적으로 뿜어내는 신비한 느낌 때문에, 와불이 일어서고 새 세상이 온다는 예언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실제로 나만 (아직) 모르는 어떤 말이 되는 비밀이 있어서, 사람들의 바람처럼 두 부처가 정말 일어나 더 다정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운주사 와불이 안고 올 그 미래의 세상은 홍이현숙 작가나 권용주 작가가 꿈꾸는 것과 다를지 않을 것 같다. 권용주의 작업처럼 삶을 예술이나 종교에서 소외시키지 않고, 홍이현숙의 작업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높이에 구분을 두지 않으며, 내 마음이 다른 많은 마음들과 합쳐지는 그날, 마침내 와불이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그 따뜻하고 넓은 손바닥을 보여주지 싶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발치 아래 누워 있는 와불의 겸손한 웃음이 한 없이 인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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