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여러 순간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시간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 시간이란 ‘되어 있음’ 이전에 존재하는
‘되어 감’의 시간이다.
— 존 버거,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프롤로그
들리는가…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 지척에서 펼쳐지고 있다. 민간인의 집을 파괴하는 폭격기, 붉게 오염된 나일강, 땅을 가르고 산을 무너뜨리는 폭염, 길고양이를 내쫓는 포크레인. 지금 이 땅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발적 사고나 냉소적 인과응보로 상대화하지 않도록.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개체의 고통 앞에서 적어도 냉담해지지 않도록. 경제학자는 세계화와 디지털 혁명의 아젠다를 제시하고, 진보 사회학자는 공평한 분배와 평화적 협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 급진 환경운동가는 불매 운동과 혁명적 구호를 외치나, 작금의 소비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흐름 속에서 어느새 자연재해는 보상받을 수 있는 사고가 되었고 인명 피해는 청구할 수 있는 보험이 되었다. 고통이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라 믿고, 맡을 수 있는 혹은 맡아야 하는 담보가 된 오늘날, 고통에 대해 그래도 말하고자 함은 그로 인해 상실될 수 있는 더 많은 감각들을 되돌리기 위함이다. 홍이현숙의 어둠은 고통을 외면한 우리의 눈감음을 인지하도록 하고, 바쁜 일상을 더 성실하게 살아가느라 이제는 실명에 가까워진 우리의 무감각을 반박할 수 없게 한다. 어둠으로의 초대는 감은 눈을 뜨게 하고 하마터면 잃어버릴뻔한 시력을 되찾기 위한 살풀이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의 어둠과 당신의 어둠과 우리의 어둠이 더 먼 시간 속의 어둠과 함께할 수 있도록.
어둠의
밤, 동굴, 지하, 고통, 두려움, 길 잃음, 음흉하고 은밀한, 고독과 억압, 징벌과 감금…, 어둠을 둘러싼 기운은 밝고 건강한 양지의 그것과 대척점에 선다. 어둠은 빛이 부재한 공간임과 동시에 빛을 부정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어둠은 늘 빛을 따르고, 빛은 늘 어둠을 이끄는데, 어쩌다 둘은 따로 떼어졌을까.
1633년 종교재판은 늙고 허약한 한 과학자를 교회의 토굴 감방으로 끌고 가 고문하는 기구들을 보게 하고 자신의 논지를 취하하도록 유도했다. 어둠 속에 내재된 고립이라는 징벌은 그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물을 통해 예견된다. 빛의 부재는 자신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자신의 논지를 취하–자신의 죄를 인정 혹은 무죄를 불인정-한다. 여기에서 어둠은 물리적인 동굴의 그것 이상이다. 어둠은 관습과 진실의 경계를 불투명하게 하고, 삶과 죽음의 긴박감을 부여하며 기어이 어떤 절박함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진실은 그곳에서 고개를 숙였다가 모두가 잠든 후에 다시 고개를 든다.
어둠 속의
2022년 여름 강남 한복판의 지하 12m 아래 어둠 속으로 초대되었다.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자본의 산맥 아래 덩그러니 뚫린 구멍에서 일어나는 집체 퍼포먼스는 상상된, 가상의 혹은 연출된 (비)인간 감각의 총합이다. 집체 퍼포먼스라니! 여기에서 ‘집체(集體)’란 사전적으로 물체가 한곳에 모여 이루어진 것, 힘, 지혜, 동작, 개념 따위를 하나로 뭉친 것, 혹은 여럿이 모여 하나를 이룬 집단이나 조직으로 정의된다. 1970–8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면, 전교생이 매주 운동장에 모여 줄을 맞춰 국민 체조를 따라한 것, 오후 5시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울리던 사이렌,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불렀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나를 포함한 지금의 중년 관객이라면 혹은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어느 세대의 관객이라도 어둠 속의 집체 퍼포먼스에 대한 적잖은 불편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둠으로 들어가는 절차들, 더듬더듬 뒤엉킨 몸과 살, 들킬 수 밖에 없는 두려움, 발바닥에 닿는 서늘한 기운과 손끝으로 전해지는 은밀한 박동, 갈증과 비실비실 스며 나오는 침샘. 어둠 속의 불안한 몸은 불현듯 또 다른 어둠들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불이 켜지지 않던 화장실, 발끝이 닿지 않던 꿈속의 바닥, 넘어설 수 없던 편견이라는 벽, 독거노인의 좁은 방, 가스 학살 수용소, 가라앉는 배, 도살장…어둠은 어린 추억으로부터 무의식의 세계까지, 상상의 이야기에서 역사적 사실까지,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먼 곳의 그들이 스멀스멀 어둠 속으로 모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용성을 잃은 것들이 처분당하듯 사회에서 밀려난 여성들, 노동에서 사라진 사람들, 베어진 나무들, 잠잘 곳을 빼앗긴 고양이들, 주변으로 밀려난 환경들이 어둠 속에서 손잡는다. 서로 스스로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어떠한 우월감도 경계심도 없이 자신만의 목소리로 웅얼웅얼, 휘이익 휘이익, 스르륵 스르륵 춤춘다. 홍이현숙의 어둠은 제대로 정리해서 보여 줄 수 없는 것, 말로 쓰일 수 없는 것, 입술로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포용하는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장소가 된다.
홍이현숙의 어둠은 기억과 망각, 허구와 상상, 두려움과 즐거움, 삶과 죽음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레퍼토리로서, 이는 거대 서사를 뒤흔드는 레퍼토리와 달리 어둠에 갇힌 미세한 감각들이고 미미한 존재들이며 하찮은 쪼가리들이고 마지못해 밟히는 잡초의 일어남을 자극하는 소음들이다. 작가는 개개의 관객이 경험한 어둠뿐만 아니라 어둠에 익숙해져 가는 안구(몸)의 변화를 조율하고, 어둠 속에서 맡았던 타자의 체취에 적응하게 된 각자의 후각(감각)을 연주했으리라. 타의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는, ‘변화의 오케스트라’로서의 집체 퍼포먼스. 그의 집체 퍼포먼스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어둠은 빛의 세상 이전으로의 복귀이다. 양지의 대척점에 있는 음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온을 판결하는 재판장도 아니며, 더욱이 한 개인의 위대한 고독을 찬양하는 성소도 아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눈을 감고,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두려움과 함께 겸허함을 배우고, 타자와 함께 있는 자신을 본다. 나의 기억을 일깨우고, 자신으로 돌아온다. 나의 목소리를 되찾고, 나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설렘 속에 빛을 향해 도약하는 시간이 지나고 침묵하는 아우성 속으로 스스로 복귀한다. 아이를 성장시키고, 한 가족을 지켜내면서 묵도한 한 시대의 역사를 폐경에 이르러 토해낼 수 있었던 그의 어둠은 아직도 여린 삶에 흔들리는 (어둠 속의) 우리에게 다시금 되찾아야 할 (어둠의) 용기를 함께 하자 손 흔든다.
“가자, 이 검은 어둠이 우리의 안내자가 될 것이다.”
레퍼토리
상상력은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포용한다. 홍이현숙에게 상상력은 세상을 보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며,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예술이 마땅히 해야 할 무엇이다. 1988년의 첫 개인전부터, 26여 년 간의 사유와 실천이 담긴 홍이현숙의 작업 노트 『금성까지 왕복달리기』(2013)는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그리고 예술을 한다는 것에 대한 담담한 기록이다.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 새벽에 잠시 다녀오는 상상의 작업실, ‘금성’은 그에게 자유와 명상과 집중을 허락하는 유일한 장소와 시간으로서 26년의 삶을 지켜주었을 것이다. 책이 되기에 부족한 것들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지탱하게 한 엄마의 성을 자신의 이름 석 자 사이에 더하면서, 작가는 왕복 달리기를 하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조금씩 연결한다. 잠들지 못하는 이들이 낮을 견디듯이, 볼 수 없는 것들이 볼 수 있는 것들을 가까스로 지키고, 모름을 위한 자유가 앎에 의해 해방되듯이, 어둠이 품은 빛을 상상하고 빛이 품은 어둠을 상상할 때, 어둠과 빛은 다시 하나가 된다.
퍼포먼스란 어떠한 행위가 한 장소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하기에 일정 시간 동안만 지속되는 ‘사라지는 것’으로 규정되고는 한다. 이러한 퍼포먼스의 일시성은 발생한 시점과는 다른 시공간으로 소환되었을 때 더 강력한 수행력을 수반하게 되는데, 다이애나 테일러의 『퍼포먼스 퍼포먼스』 에서는 이를 ‘레퍼토리’라고 부른다. 즉, 한 장소에서 발생한 특정 행위는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이는 반복적으로 재연되고 재작동되는 현재 진행형의 몸짓과 행동의 레퍼토리가 되어, 다른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홍이현숙의 어둠은 퍼포먼스의 레퍼토리로서 사라진 무엇과 남는 어딘가의 사이를 부유하며, 누군가의 몸도 아니고 어딘가의 장소도 아닌 관계를 통해, 몸으로 연결된 역사의식을 일깨운다. 나의 두려움에서 당신의 두려움을 상상하고, 그 두려움을 둘러싼 사회를 직시하며, 현재를 구축한 역사를 반성하는 실천적 장소로서 퍼포먼스. 그의 퍼포먼스는 삶과 깊게 연루되어 있기에 단지 현재에만 관여하지 않을뿐더러 절대 지금 여기 한 번에 머무르지 않고 그다음의 다음으로 향한다.
호기심이 많고 장난기 가득한 그의 눈에서, 풍자와 반어법에 능하고 인간미 넘치는 그의 혀에서, 그리고 실험과 도전으로 무장한 그의 손에서 우리는 홍이현숙의 어둠을 발견한다. 홍이현숙의 어둠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이 아닌 우리 안에 꽁꽁 숨겨놓은, 실재하는 매우 구체적인 물질들이다. 겨드랑이에서 피어오르는 털이고, 피부를 뚫고 새어 나오는 땀이고, 아직도 꿈틀대는 욕망이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다. 그 어둠이 바로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생명의 소리이자 자연의 소리이고 역사의 소리일 것이다. 어둠은 어둠 속에 있다. 홍이현숙이 제안하는 어둠, 암흑 그리고 칠흑이란 바로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있는 사유와 감각, 그리하여 촉지(haptic)할 수 있는 가치와 변화일 것이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 구구절절하고 구차한 모든 절차와 상황, 이 모두를 움켜쥐고 번듯하게 서 있는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군상을 벗겨내는 것, 시간과 장소를 까발리고 벗겨내고 도려내는 것, 그렇게 해서 새로이 창조되는 시공간의 에너지, 이것이 아마도 홍이현숙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어둠 속의 레퍼토리일 것이다.
에필로그
1988년 도시재생사업으로 베어진 버드나무 고동을 일으켜 세운 홍이현숙은 삼십여 년이 지나 버드나무를 가로질러 버드나무 아래 물가를 달린다. 흔들흔들 버드나무들이 개척지를 일구는 억척스런 손들에게 뱃고동의 푸른 이야기를 속삭일 때. 잘리고 베어져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명을 간직한 채 가느다란 숨소리로 다가올 때. 그녀의 손바닥이 면면히 펼쳐진 핏줄의 맥을 되살려 지붕 위 고양이의 심장처럼 두근거릴 때. “우리 주변의 모든 종들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 버드나무는. 버드나무가 일으키는 바람은 나와 당신과 그들을 더 먼 땅의 역사 속으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