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다, 단채널 비디오, 2분 13초, 2012
몽골 남고비 초원과 그곳에서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나의 뒷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저렇게 길게 멀리 사라지는 것에 진지하게 초점을 맞추어보겠나? 지평선 너머로 소멸하는 어떤 것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경이롭다. 시시각각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먼 곳에 초점을 맞춘다. 몽골 사람들의 시력은 7.0이 한계라 한다.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어떤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 초원의 빈 공간의 부피감을 재현한다. 거칠 것 없이 불어대는 초원의 바람소리도 같이 담았다.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달란자드가드 공항으로 다시 1시간 30분 남짓 비행기를 타고 가서 버스로 갈아탄 뒤 1시간여를 더 달려 도착한 남고비 초원. 그 한가운데 있는 게르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문득 만난 몽골의 밤하늘.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마셨다. 이렇게 만나는군! 기막힘과 막막함이 내 팔에 오톨도톨 소름을 돋게 하여 나도 모르게 양팔을 쓸어내렸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세상의 중심임을 묵직하게 깨달았다. 하늘이 나를 구심점으로 딱 엎어진 반구(半球) 모양이었다. 봐라, 하늘이 나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지 않은가? 이럴 수가! 내가 저만치 뛰어가 자리를 옮기니 우와, 거대한 반구의 하늘이 나를 따라온다! 목이 아팠지만 고개를 떨굴 수가 없었다. 우와, 살아 있음이 이렇게 기쁠 수가! 그 풍경 안에 있는 내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누구에겐가 연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멀리, 저렇게 멀리 있는 별에서 오는 빛이 나에게로 와 내 눈을 찌르니 이대로 눈멀어도 좋으리라! 그대로 주저앉아 그 하늘을 내 몸 구석구석에 받아들였다.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별들이 총총 박힌 반구의 하늘은 거대한 왕관 같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왕관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들이라니!
남고비에서 전생의 언니, 나르힝겔 (몽골어로 ‘나르’ 는 ‘해’ 이고 ‘힝겔’ 은 ‘빛’ 을 뜻한다)을 만났다. 틀림없다. 분명히 그는 내 언니였다.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남고비 초원에서 유목민의 아내로 살고 있었다. 실제 나이는 나보다 열 살쯤 어리다고 하지만 의젓한 언니였다. 첫날 보자마자 막무가내로 안기는 나를 마주 안고 말없이 쓸어주었다. 그녀의 젖은 눈과 거칠지만 따뜻했던 손길을 끝끝내 잊지 못하리라. 그녀는 200마리가 넘는 염소와 양젖을 2시간 간격으로 짜야 했기 때문에 쉴 짬이 없었는데도 내가 가면 항상 반갑게 두 손을 잡아주었다. 어떤 맑게 내린 마유주를 주며 선 채로 들이켜라 권했고, 어떤 땐 내 청에 못 이겨 수줍은 목소리로 몽골 노래를 들려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왜 그때 나는 내가 무례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지 이상하다. 나르힝겔은 여름에는 유목생활을 하고 겨울에는 도시로 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산다고 했다. 재수 좋게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게르가 나르힝겔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나르힝겔네 갔다가 그녀가 바쁠 땐 그녀 주위를 빙빙 돌다 왔고 어쩌다 시간이 나면 사진을 찍었으며 통역하는 친구랑 같이 갔을 때는 영상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찢어지고 낡은 옷에 까맣게 타서 나이보다도 더 늙어 보였지만 글자 그대로 인간의 ‘위엄’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없이 가르쳐주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위엄!
남고비에서 전생의 언니, 나르힝겔 (몽골어로 ‘나르’ 는 ‘해’ 이고 ‘힝겔’ 은 ‘빛’ 을 뜻한다)을 만났다. 틀림없다. 분명히 그는 내 언니였다.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남고비 초원에서 유목민의 아내로 살고 있었다. 실제 나이는 나보다 열 살쯤 어리다고 하지만 의젓한 언니였다. 첫날 보자마자 막무가내로 안기는 나를 마주 안고 말없이 쓸어주었다. 그녀의 젖은 눈과 거칠지만 따뜻했던 손길을 끝끝내 잊지 못하리라. 그녀는 200마리가 넘는 염소와 양젖을 2시간 간격으로 짜야 했기 때문에 쉴 짬이 없었는데도 내가 가면 항상 반갑게 두 손을 잡아주었다. 어떤 맑게 내린 마유주를 주며 선 채로 들이켜라 권했고, 어떤 땐 내 청에 못 이겨 수줍은 목소리로 몽골 노래를 들려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왜 그때 나는 내가 무례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지 이상하다. 나르힝겔은 여름에는 유목생활을 하고 겨울에는 도시로 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산다고 했다. 재수 좋게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게르가 나르힝겔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나르힝겔네 갔다가 그녀가 바쁠 땐 그녀 주위를 빙빙 돌다 왔고 어쩌다 시간이 나면 사진을 찍었으며 통역하는 친구랑 같이 갔을 때는 영상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찢어지고 낡은 옷에 까맣게 타서 나이보다도 더 늙어 보였지만 글자 그대로 인간의 ‘위엄’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없이 가르쳐주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위엄!
델을 만들다, 단채널 비디오, 7분 11초, 2012
몽골의 델이 참 아름다워 보여서 꼭 하나 장만하고 싶어서 기사아저씨네 동네에서 수소문 끝에 델 만드는 아줌마를 만날 수 있었다. 아줌마의 게르는 평소에는 남편이 만두튀김을 만들어서 파는 가게였다가 델 주문이 들어오면 델을 만드는 양장점이기도 했다. 아줌마는 내가 좀 돕고 싶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고 영상을 찍는 것도 흔쾌히 허락했다.
몽골에 가기 전에 내 작업과는 별도로 우리나라 작가들과 몽골 작가들과의 공동 명상 작업 (Moduna meditation) 을 준비했다. 몽골에는 우리나라 서낭당에 해당하는 어워가 있는데, 마을 입구나 길목에 돌탑을 쌓고 파란색 천을 묶어놓아 초원의 바람에 아름답게 나부꼈다. 동대문시장에서 파란색 옷을 사가고, 울란바토르에 있는 시장에서 진짜 어워에 쓰는 천을 샀다.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성소(聖所)로서의 ‘어워’ 의 조형성을 떠올리면서 각자의 몸을 하나의 돌처럼 써서 무빙 어워(Moving Ovoo)를 만들어보는 명상 작업을 하기로 하고 그것을 촬영하기로 했다. 남고비 초원에서의 촬영은 새벽 5시 30분쯤 시작해야 한다. 6시 30분쯤에 해가 뜨기 시작하면 넓은 초원의 조도가 확 높아진다. 해가 쨍한 초원은 그것대로 아름답지만 좋은 사진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공동 프로젝트 촬영을 위해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면서 전날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쉽겠나? 5시부터 짐게 씨(몽골생활 내내 통역을 맡아준 유쾌하고 바지런한 몽골 아가씨로 나중에 한국에 와서 자주 만났다)와 작가들의 게르를 돌아다니면서 문을 두드렸다. 일어나기 어려웠지만 다행히 거의 모든 작가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몽골 작가 어버, 주께, 슈케, 도기, 모기, 노민, 한국 작가 릴릴, 수영, 금홍, 써니킴, 수진 씨와 짐게 씨까지. 승현 씨는 나와 함께 이 모두의 사진을 촬영해주었다. 작업은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진행되었다. 한 사람이 옆 사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거기에 반응하고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작가들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아침 해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우주를 활짝 느끼고 그 기를 바로 옆 사람들과 몸을 통해 나누었다. 조금씩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다함께 서서 하나의 조형물을 만들고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하면서 드넓은 초원에, 가득 찬 침묵 속에 오직 바람소리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순간 그들은 마치 어디 다른 생(生)으로 불려간 듯 이만치 떨어져서 카메라를 잡고 있는 나와의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남고비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몽골의 해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그때의 경험은 우리 각자의 몸 깊숙한 곳에 각인되었으리라!
몽골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울란바토르 전시를 하루 앞둔 날 저녁, 우리는 기획자 수진 씨 방에 모였다. 맥주 한 캔 씩을 앞에 놓고 우리의 작업들이 ‘무력한 낭만’ 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초심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사실 몽골의 초원은, 바람은, 우리를 무기력한 작가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우리는 그 풍경들의 품에 아무런 저항 없이 투항하고 싶은 유혹을 시시때때로 느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를 생산해내야만 한다는 조급증이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다는 것도 고백해야겠다. 그래서 오히려 놓친 것들. 아깝다!
2011년 10월
201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