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이야기를 통한 여정,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며>

1. 취약성을 내려놓기 위한 땅 파기
인생의 대부분을 창작에 바쳐온 한 중견 예술가의 작업을 보려할 때, 그의 어떤 시간대를 기준으로 살펴봐야 할까? 특히 그의 작업이 항상 자신과 주변의 삶을 깊이 반영하고 있다면 말이다. 나는 언제나, 아직 많은 것이 그에게 흘러들어오지 않았던 초창기로 되돌아가서 보는 걸 선호한다. 물론 내게도 젊은 시절과 돌아볼 수 있는 출발점이 있다. 그러므로 나도 쌓아온 얇은 층들을 가능한 한 많이 벗겨내야 한다. 이런 연습은 홍이현숙의 작품을 마주할 때 더욱 중요해진다. 나는 최대한 내 그릇을 비우고, 그의 이야기로 천천히 채워가며, 선구자와 같이 작가가 걸어온 미래를 가장 선명한 감각으로 경험하고자 한다. 또한 작가에게서 많은 인용문을 가지고 와서, 다시 살기 위해 먼저 함께 죽는 연습을 하고자 한다.
   홍이현숙의 초기 작품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으며 그의 젊은 시절을 회상해 본다: 중학교 시절 매일 건너던 흔들리는 육교, 집으로 이어지는 장미원 옆길, 거기 더 이상 서 있지 않는 버드나무들, 갓난아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많은 양의 옷 등.

“ 사물이든 마음이든 틈은 있게 마련이고,
그 틈은 딱딱한 것 같지만 의외로 말랑말랑하고
연약한 내부로 가는 길이다.”

홍이현숙의 첫 전시는 어느 날 갑자기 벌목된 집 근처의 버드나무를 애도하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따뜻했던 나무들의 몸을 수습해 전시 공간에 다양한 형태로 배치했다. 작가는 전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85년, 나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가을에 결혼해서 1987년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연이어 1988년 봄에는 둘째를 임신했다. 그 와중에 왜 그렇게 전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1958년에 태어난 내가 꼭 30세를 지나는 해였으니 나름 하나의 통과 의례가 필요했던 걸까? 하여튼 그때는 전시를 당장 하지 않으면 딱 죽을 것만 같았다. 뭔가가 몸속에 가득 차 숨이 턱까지 찬 느낌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뱉어내지 않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그에게 예술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에게 예술은 사회에 의해 버려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낮게 평가되었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맥동하는 에너지를 담아낼 공간을 찾는 방식이었다.
   홍이현숙이 35세 때 의류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양의 옷을 남겼는데, 이 시기는 홍이현숙이 숨겨둔 에너지를 사회에 쏟아붓기 시작한 순간과도 맞물린다. 작가는 그 옷들을 가지고 집에서 나와 국립극장 돌계단 틈새(1998)와 경기도미술관 앞마당 나무판자 사이(2008)를 메꾸고, 심지어 남한과 북한 사이에 자리한 통일전망대를 과자봉지로 덮어 호피 무늬 호랑이 형상(2002)을 만들었다. 그는 따뜻함을 필요로 하는 개인들을 찾아가는 대신, 국가와 군대, 예술과 권위의 위계라는 기성 시스템에 속한 집단 신체를 세밀히 측정해 이를 일상의 색채와 따뜻함, 상상력으로 부드럽게 풀어낸다. 그래서 그는 항상 틈새에 주목한다

“ 우리 머릿속에서 버려진 회색빛 공간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들여다보기. 끌어안아 보기.
그 속에 답이 있다.”

홍이현숙은 삶의 기억을 상징하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사회에 남겨진 경직된 흔적들을 녹여내고, 이를 통해 세상의 광활함을 마주한다. 그는 세상의 변두리를 따라 걸으면서 더 많은 틈새를 만나는데, 이는 끝없는 애도와 긴 이별을 의미하는 행위와도 같다. 예컨대 자신이 한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홍이현숙은 중년 여성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잠옷을 입고 도시를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장소들을 하나씩 지나쳤고, 때로는 새로 세워진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아래에 어린 소녀처럼 드러눕기도 했다(〈광화문 정물〉, 2011)

“풍경은 늘 움직인다. 움직이는 풍경에는 틈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 틈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그 틈이 있기에 우리는 또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

나는 홍이현숙이 견고한 어미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가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를 잃은 후 맞닥뜨린 일종의 뿌리 없는 공허함을 마주하는 방식을 보게 된다. 그 과정은 그를 집단적 꿈과 행동으로 이끈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마흔에 가까워졌을 때, 농사를 시작했다. 그의 예술도 마찬가지로 사회의 토양을 갈고 경작하는 작업이었고, 이를 통해 작가는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홍이현숙의 작업에서 유사한 대만의 풍경을 발견했는데, 당시 대만 여성 예술가들 역시 야성적이면서도 정교하고, 급진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사회는 여전히 팽창하며 형성 중이었고, 오랜 억압과 침묵의 쓰라림을 풀어낸 후, 진보와 자유를 향해 거칠게 달려가려던 시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어쩌면 너무 빨리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과 자연 모두가 상처와 파괴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연대의 바다
생태여성주의는 여성과 대지는 동일한 억압의 운명을 짊어졌지만, 관용과 개방성이라는 같은 특성을 물려받았기에 서로 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자본주의의 착취에 저항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홍이현숙에게 흙을 뒤집고 씨앗을 심는 일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적용된 실제적인 실천이다. 《풀과 털》(2005)에서 작가는 자살한 동갑내기 이웃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했고, 천천히 자라는 머리카락은 전시 공간에 배치된 몇 그루의 선인장과 공명했다. 이러한 애도는 공공 공간에서 물러나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는데, 이는 가정주부의 평범한 삶을 깊이 파고들어 매일 매일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로 확장되는 어두움과 우울증을 조명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고인과 남겨진 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홍이현숙은 이 질문이 자신을 다시 한번 여자로서의 운명 속으로 끌어당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08년, 쉰 살이 된 홍이현숙은 비슷한 나이의 두 여성 예술가, 안현숙, 용해숙과 함께 밀폐된 전시 공간의 벽, 바닥, 천장을 노란 물질로 뒤덮은 〈비닐장판 바닥에서의 항해〉(2008)를 선보였다. 이 작업은 “가느다랗지만 팽팽한 원을 만들고 그 원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도록, 또는 그 원 안으로 쪼그라들지 않도록 일정한 힘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 가능한 힘”을 표현했다. 전시 공간에는 식물이 설치되고, 홍이현숙은 자신의 몸을 작은 배로 변형시켜 풀이 바다처럼 흔들릴 때 그 바다를 떠돌았다. 이제 그는 30대의 고독을 회상하고, 연대를 통해 힘을 흡수하고 나누며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었고, 자신을 확장해 더 많은 생명과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
   2012년, 홍이현숙은 여성으로서의 중요한 시기를 마무리하는 집단적 애도와 축하의 의미를 담은 ‘폐경 의례’을 시작했다. 폐경기 동안, 월경혈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흐름을 멈추고, 자궁은 완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요의 순간은 강력하고 성스러운 에너지를 담고 있다. 바로 이 에너지가 홍이현숙으로 하여금 차가운 벽 뒤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영상 작품 〈폐경, 폐경〉(2012)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가 몸 속에 흐르는 조류를 세계의 흐름과 합류시킨다. 그리고 폐경 의식에 참여한 여성들로부터 거울을 모아 작은 공간 안에서 서로를 반사하고 증폭시키는 행위를 취한다.
   이듬해, 홍이현숙은 자신의 작업에 참여적 요소를 더욱 심화시켰다. 42분짜리 단편 영화 〈왜 우리 집에 왔니〉(2013)는 30대에서 60대 사이의 10명의 여성이 대화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배경에 등장하는 평범한 가정용품과 흩어진 물건들은 자매애의 연대를 상징한다. 홍이현숙의 연대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홍이현숙의 참여적 작업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를 설명하고 논평할 때, 나의 언어가 빈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 예술가의 창작물을 연구하는 미술평론가로서, 나는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분명히 부족함이 있다. 이는 특히 홍이현숙이 자신의 스펙트럼을 인간 이외의 생명체로 확장하려 할 때 더욱 커진다. 폐경기가 그의 에너지를 증폭시킨 듯, 거리를 배회하던 작가는 때로는 네발로 기고, 때로는 집의 벽과 옥상 사이를 뛰어넘는 등 진화를 거듭한다. 홍이현숙은 다른 종의 동물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과도기적 공간에 자신의 몸을 배치할 뿐만 아니라 사자, 고래 등의 요가 자세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세를 취하고 소리를 흉내 내면서 ‘그들처럼 되기’를 연습한다(〈수행일지—고래자세〉(2018)). 나는 문득 홍이현숙에게는 어떤 것이—거대한 몸에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노력과 공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생명체의 삶에 닿아보려 하는 시도 중—더 외로운 실천인지 궁금해진다. 
   근대성이 가속화한 파괴에 직면하여, 우리는 도나 해러웨이(Dona Haraway)의 『친족 만들기』에서 얻은 교훈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집단주의가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우리가 모두 공동으로 지고 있는 부채를 직시해야 한다. 문화학자이자 페미니스트 환경 인문학의 옹호자인 제니퍼 메이 해밀턴(Jennifer Hamilton)과 아스트리다 네이마니스(Astrida Neimanis)는 “서구 자유주의의 보편적 주체의 폭력에 맞서는 연대의 희망이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들의 과제로 남아 있는 가운데, 어떤 형태의 ‘우리’를 표현해야 하는 불가능한 필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유대감 있는 공동체—를 식별하려고 할 때, 그러한 식별이 로빈 위그만(2012:13)이 “보편주의의 우뚝 솟은 지옥. 자기 도취의 거대한 과시. 백인 여성의 연설이 만들어낸 대작”이라고 부르는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홍이현숙의 접근 방식은 비인간 종에 대한 일방적인 돌봄이나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다. 겉으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다른 종(種) 사이의 상호작용은 그에게 “다양한 형태를 창조하는 일종의 무술로, 서로 교차하거나 교류하는 현실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석광사 근방〉(2020) 영상 작업에서 나는 비서구적 연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초월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작가가 겉보기에 무의미한 연습을 한 후에 고양이의 등을 타고 달아나는 것과 같은 갑작스러운 동작을 취하며 도약하는 행위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 환상적인 이미지는 고대적이면서도 미래적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자유를 찾기 위해, 홍이현숙은 자신을 해체하며 자신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오늘날까지 홍이현숙은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자신의 감각을 연마하고 있다. 그는 더 많은 참여형 워크숍을 기획하고, 귀가 먹먹해지는 비행기 소음 속에서 참가자들과 수화로 소통하고(〈수어 배우는 시간〉(2023)), 지하 12피트 아래에 위치한 어두운 방에서 점자를 만지기도 한다(〈12미터 아래, 종들의 스펙터클〉(2022)). 때로는 특정 감각을 의도적으로 차단하여 능력주의에 도전하고 장애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지혜를 조명하기도 한다. 홍이현숙의 작품은 고립된 섬 같은 몸들이 하나의 거대한 자궁이 되어 세상의 모든 작은 배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착륙할 곳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그 몸들의 차이를 서서히 지워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3. 빚이 선물이 될 때
나는 홍이현숙 작가의 작품에서 아직 어떤 거대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거대한 것들은 종종 권력, 자원, 인과관계, 그리고 이익과 얽혀 있다. 정의와 사랑만을 외치며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홍이현숙은 의도적으로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과의 연대를 추구하며, 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로 변모하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얻은 지식을 (만약 있다면) 현대 사회는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으로 취급하지만, 그 지식은 상처를 치유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을 일깨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가을 오후, 나는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 부산시립미술관에 도착했다. 한때 쓰레기로 가득했던 이 섬은 여전히 고요했고, 미술관의 외벽은 이끼로 덮여 있어 생태 문제를 탐구하려는 최근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었다. 미술관 내부에서는 생태를 주제로 한 두 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작품들 사이를 조용히 거닐며, 나는 언젠가 홍이현숙이 미술관 주변 환경과 자연, 그리고 역사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의 이러한 사랑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지하에서는 홍이현숙의 신작 〈버드나무가 돌아왔다〉(2023)가 상영 중이었는데, 이 작품은 멸종된 종의 귀환(혹은 실패한 귀환)에 대한 사변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비디오 속에서 푸른 망토를 입고 강둑을 헤매는 고래는 바다에서 온 전령을 상징한다. 고래는 물이 보낸 메시지를 전하며, 1988년 올림픽 당시 씨앗 알레르기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베어졌던 버드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연히 우주여행을 하게 된 씨앗들이 바람, 물새, 동물, 물 등에 의해 운반되어 결국 다시 피어나고 번성하게 된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작품의 시적인 발언을 통해 홍이현숙은 “불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포타와토미(Potawatomi) 선주민 공동체의 전통적인 이야기하기(storytelling)의 방식을 언급한다. ‘일곱 할아버지의 가르침(7 Grandfather Teachings)’로도 알려진 그들의 가르침은 여러 세대를 걸쳐 전수되며 지혜와 존경, 정직성, 인간성, 용기, 진실을 심어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집단적 책임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바네사 마차도, 올리베이라 안드레오티는 저서 『병든 근대성을 돌보기: 인간성의 잘못과 사회적 활동에 대한 함의』에서 우리가 깊이 의존하고 있는 근대성에 작별을 고하는 방법을 공유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글은 내가 오랫동안 몸담아 온 예술계에 대해 성찰하게 했다.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욕망은 무의식적으로 예술을 감상하는 우리의 눈과 마음에 전달되고, 모든 의식적인 저항은 여전히 근대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기존의 지식과 언어 체계에 흡수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세포를 근대성이 지운 부채, 특권으로 가득 채우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든 종류의 삶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와 책임의 깊이를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빛나는 눈빛의 백발 소녀는 고대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가 어린 시절에 작별을 고했던 버드나무들이 다시금 부드럽게 흔들린다.

“우리도 추락하고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우리의 삶은 씨앗의 궤적을 따라간다.
우리는 빙글빙글 돌다가 새롭고 예상치 못한 곳에 떨어진다.
우리는 추락을 두려워하지만 세상의 선물이
우리를 붙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마치 홍이현숙과 함께 오랜 여정을 동행해 왔고, 그 시작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가 길을 따라 흙을 갈고, 작은 배가 표류하는 그 바다를 건너 동맹을 맺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홍이현숙과 함께 나는 바람을 따라 두 팔을 벌려 어떤 형태로든 돌아오는 모든 떠나간 사랑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다. 홍이현숙의 작업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필요성’을 구현한, 누구에게는 쓸모없지만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한 축복의 화신이다.

번역: 임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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