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현숙과 조은지

생태주의 페미니즘
환상의 복식조 6라운드는 생태주의 페미니즘을 화두로 홍이현숙(Hong Lee, Hyun-sook, 1958-)과 조은지(Eunji Cho, 1973-)를 초대했다. 이들은 페미니즘의 목표와 생태학 운동의 목표를 동일시하며 자연과 여성을 타자화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지배원리를 비판하는 점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호명될 수 있다. 특히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생태학적 관점을 포함하고 생태문제는 페미니즘 관점에 기초해야 한다는 급진적 생태주의 페미니즘과 궤를 같이하며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의 근원을 환경 뿐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진화과정에서 찾으며 더불어 사는 공생적 삶의 방식을 통해 여성과 자연을 동시에 해방시키고자 한다.
생태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홍이현숙과 조은지의 작업은 두 가지 두드러지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우선 인간과 세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동식물과 같은 비인간 존재와의 연관성과 연대감을 강조하며, 현대 에코페미니즘의 중요 이슈인 ‘동물주의(animalism)’를 표방하는 점이다. 인간과 동물이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견지에서 동물 자체의 가치를 존중하고 동물의 권익을 주장하는 동물주의자들에게 동물권 옹호는 인권 옹호로 연결되고 그것을 여권 신장으로 이어진다. 여성과 동물을 문명과 상치되는 자연과 동일시하며 이분법적 하위체로 범주화하는 부계적 위계에 맞서 이들은 자연, 동물, 여성의 연대감과 합일을 지향한다.
다음으로, 동시대 동아시아 한국 여성, 비서구 작가로서 자생적 한국 에코페니미즘 미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여성, 환경, 사회적 여건을 직시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예술행위를 통해 지역 공동체 형성 방안을 모색하고, 지금/여기 한국의 지역성과 전통에 기반한 구체적 삶의 조건과 경험을 맥락화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불안전성, 코로나 시대의 위기감 속에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학에 기반한 지혜의 변화라는 점을 강조하듯, 작품을 통해 이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요컨대 자연, 환경, 생명에 대한 존경심과 지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맞닿아 있는 이들의 작업을 통해 지역특정적 에코페미니즘의 효력과 당위성을 가늠할 수 있다.

홍이현숙의 ‘동물 되어보기’

홍이현숙은 30년간의 경력을 통틀어 지구환경, 사회현상, 젠더를 문제시하고, 인간과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젠더의 형평성에 유념하는 생태학적 작품들을 발표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에게 생태주의란 인간중심적 사회제도로부터 자연을 소생시키고 남성중심 체제로부터 여성 주체를 회복시키는 이념적, 실천적 과정에 다름아니다. 인본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일을 에코페미니스트의 역할로 인식하며, 그는 경력 초기부터 여성의 시각에서 사유되는 자연치유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헌 옷과 흙을 켜켜이 쌓아올린 구릉 같은 텃밭 구조물위에 보리싹을 틔우는 조각적 설치작업 <은닉된 에너지>(국립현대미술관, 1998)과 관련 연작들(1997-2003), 옷으로 화강석 계단 틈의 공간을 메꾼 <은닉된 에너지-옷들의 켜> (Hidden Energy, Stacked Clothes)(국립극장, 1997), 옥상 데크 판넬 사이사이에 헌옷을 자른 천 쪼가리를 끼워넣는 <틈>(Aperture) (경기도미술관, 2008) 등은 옷을 몸, 몸을 흙과 동일시하며 권위적이고 견고한 고체형 물질을 천, 몸, 흙의 훈기로 이완시키는 치유적 생태작업의 일환이었다. 동료작가들과 함께 주말농사로 재배한 들깨를 추수하여 깨를 털어내는 집단 퍼포먼스 <깨털식>(A Ritual of shake Off Perilla(2012) 역시 농사와 경작, 생명과 대지를 존중하는 작가의 의식의 발로로 보여진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북가좌 엘레지>(2009), 광명시 철산동 <여섯 개의 계단>(Six Staires)(2014>등 비디오 영상작업을 병행하며 재개발로 폐허가 된 장소를 찾아 현장을 기록하거나 그것으로부터 환기되는 상상적 기억을 영상화했다.
작가는 이후 자신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다수의 퍼포먼스 비디오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특정 과제의 수행자이자, 자신이 작성한 텍스트를 낭독하는 화자로 등장한다. 그는 전인적인 퍼포머가 되기 위하여 요가, 암벽등반으로 체력을 단련하여 담벼락 기어오르기, 바다에 잠수하기 등 퍼포먼스가 요구하는 고난도 임무를 대역없이 수행한다. 예컨대 2012년 <폐경의례>1,2편(A Ritual Menopause)은 날렵한 동작으로 건물 사이 사이를 날아다니는 초능력적 여성을 연기, 연출한 싱글채널 비디오다. 불임과 노화의 징후로 여성을 위축시키는 폐경 현상을 오히려 신체적 생리 부담으로부터 해방되고 제도적으로 구축된 여성성을 떨쳐버리는 역전의 계기로 전환시킨 것이다. 네 귀퉁이 방바닥을 몸 전체로 쓸며 돌고 도는 반복적 행위로 결코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여성의 현실을 풍자한 2006년의 미니멀 경향의 비디오 <구르기>(Rolling)에 비하면, <폐경의례>는 사회적 억압을 통쾌한 반란으로 맞받아 친 50세 페미니스트의 ‘재생의례’ 같아 보인다.
<구르기>와 <폐경의례> 두 작품 모두에서 작가는 파란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다. 가볍고 시원하여 “냉장고 원피스”라고 불린 이 옷을 “모래내 시장 좌판에서 오천원 주고 샀다”고 한다. 스스로를 싸구려 꽃무늬 옷을 입은 변두리 여자로 이미지화한 것인데 이것이 이후 퍼포먼스용 작가 고유의 ‘코스프레’ 의상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꽃무늬 의상이 여성의 환상과 욕망의 메타포로서의 꽃의 함의와는 전혀 다른, 작가의 말을 빌자면 “개발이나 근대화와 거리가 먼, 집요하지만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중년 여자”를 표상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여자와 자연을 폄하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항의하듯, 스스로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여자로 변신함으로써 인류의 생태학적 범죄로부터 무고한 원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것일까?
갱년기 여성 무용담의 연장선상에서 작가는 모계신화의 원형인 마고할미를 소환한다. 마고할미, 설문대 할망 등, 할머니로 표상되는 전지전능의 거인 여신의 창세신화는 폐경으로 암시되는 늙은 여자,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노파에 대한 가부장 시선을 맞받아치는 설욕의 알레고리로 독해할 수 있다. <땅굴, 마고할미의 DMZ 팬파이프>( Underground Tunnel, Magohalmi's DMZ Pan Pipe) 2015는 비무장지대 남단에서 땅굴을 파는 퍼포먼스를 찍은 단채널 비디오이다. 의인화된 땅굴이자 자신의 분신으로 파란 원피스를 입은 마고할미를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등장시켜 DMZ 생태계가 손상되지 않은 채 지하로 연결되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그려본다. 땅굴들로 만든 요철의 팬파이프를 연주하는 마고할미를 상상하며, 오른쪽 발은 서해에, 왼쪽 발은 동해에 걸쳐 놓은 채 읔 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손으로 악기를 두드리는 마고할미의 초능력만이 남북을 연결하고 교류를 이룰 수 있다는 바램의 은유인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위한 작가의 ‘동물주의’ 이념이 처음 표출된 것은 단채널 비디오 설치 <사자자세>(Being a Lion)-2016), <고래자세>( Being a Whale)- 2018)를 통해서이다. 일반적인 동물 애호나 보호와는 다른, 다른 가치와 자세를 요구하는 동물주의의 선언이듯, 그는 ‘자세’라는 제목을 내걸고 인격동일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전자는 요가 동작 가운데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사자자세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작가가 헉헉 몸의 진동소리를 내며 사자자세를 연마하는 다양한 장면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고래는 소리로만 인식되기 때문에 후자에서는 인터넷에서 채집한 고래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받아쓰는 불가역적 과정을 영상화했다. 작가는 고래의 감각을 얻기 위해 인간 언어로는 불가능한 음역대를 온몸으로 발성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래 ‘되어보기’를 수행한 것이다. 아마도 사자가 되기 위해, 고래가 되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동물에 대한 사죄 표현이자 동물을 환대하는 작가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고래소리 채집으로 고래 언어를 익히고 <고래자세>를 완성하고자 하는 그의 예술적 갈망은 동물권 세미나에서 울산의 고래암각화를 보러간 답사 여행을 계기로 고래소리 데이터 수집으로 이어지고, 결국 작가에게 캘리포니아 MBARI (몬트레이만 아쿠아리움 연구소)로부터 고래 8종의 소리 데이터를 구하는 행운을 안겨주었고, 종래는 2020년 아르코미술관 개인전 「휭, 추-푸」( Swoosh, Tsu-pu!)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2015-2019년간 몬트레이만에 설치된 수중 청음기에 녹음된 고래들의 실제 목소리를 청취가능한 음역대로 편집, 변환시켜 8대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는 ‘앰비언트’ 사운드 설치 작업을 발표했다. 그것은 “선박과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소음에 고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심한 경우 길을 잃고 목숨마저 위험하다"는 경각심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지구에 우리만이 아닌 다른 생명체와 함께 하고 있음을 느껴보길” 권유한, 고래가 기거하는 심해로의 초대였다.
「휭, 추-푸」전은 암흑같이 캄캄한 1층 전시장 공간을 유영하는 고래 소리로 가득 채운 〈여덟 마리 등대〉(Eight Lighthouses)로 시작된다. 관객은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뗏목을 연상시키는 기울어진 쪽방에 앉아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고래소리, ‘웅', '핏핏핏', '뿌루루루' '휭우우' 하는 처음 들어보는 경이로운 소리를 경청하며 숙연해진다. 남아메리카 토착민 언어 케추아어로 '휭'은 바람에 무언가 날리는 소리, '추푸'는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를 뜻한다는 전시 제목처럼, 그는 영험적이고 원형적인 고래 소리를 통해 문명 이전의 태고적 인간으로 회귀할 것을 꿈꾼다. 실로 이 전시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임을 버리고 새로운 공생체로 다시 세팅되어야한다”는 동물권의 옹호론자의 염원과 에코페미니스트의 대명제를 피력한 홍이현숙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선언문을 완결시키려는듯, 그는 2층 전시에서 자신의 전력을 보여주는 아카이브와 함께 비인간 생명체와의 공생을 꿈꾸며 ‘동물되기’를 시도한 <석광사 근방>( In The Neghiborhood of Seokgwangsa)-2020과 <한낮의 승가사>(Midday Seungga Temple)-2019 , 두 점의 신작 퍼포먼스 비디오를 발표했다. <석광사 근방>은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석광사 주변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와 조우하는 장면들을 담았다. 재개발로 살 곳을 잃은 고양이들의 서식처가 된 이곳에서 여전히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60대의 여자는 고양이처럼 살아봐야 고양이 처지를 알 수 있다는 듯이, 고양이와 눈을 맞추고 고양이 자세를 흉내내며 높은 담벼락을 기어오르거나 가파른 지붕을 타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감행한다. "개와 달리 고양이는 사는 곳을 잘 떠나지 못하는데, 재개발로 고통받고 있다"고 토로하며, 동물과의 공존, 합체를 위한 기이한 감정이입적 행태로 또다시 ‘동물되기’를 시도한 것이다. 동물권을 동물적 범주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종간의 비언어적 소통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도나 해러웨이에 공감하듯, 그는 야생동물의 행태와 비언어적 표현법을 익히는 원초적 행동 훈련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한낮의 승가사>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멀지 않은 승가사에 매일 올라가 절 주변을 배회하는 들개들과 함께 달리거나 9층 석탑을 같이 도는 장면들을 기록한 비디오의 스틸 장면들로 구성된다. 북한산 앞자락에 위치한 비구니스님들의 사찰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승가사 스님들의 초월적 불경소리와 들개의 야생적 숨소리가 비인간적인 세계로의 진입을 권유하는 한편 인간존재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승가사에서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2019년 손으로 직접 마애불을 만졌던 촉각적 경험을 떠올리며 손 대신 카메라로 불상을 천천히 훑고 묘사한 <마애불 더듬기>를 제작했다. 이 영상을 재편집하고 추가 촬영을 가하여 <휭, 추-푸>전에 발표한 <당신이 만지는 것>(What you are Touching Now)-2020에서는 너무 높고 거대하여 손이 가닿을 수 없는 마애불 전신을 카메라의 눈으로 더듬는다. 화강석 피부를 자신의 음성과 눈의 대리물인 렌즈로 접촉하는 감각의 전환을 통해 무의식에 호소하는 또 다른 차원의 ‘인간의 확장’을 시도한 것이다. 마애불 더듬기와 만지기는 결국 이성적 문자언어보다 직관적이고 원초적인 음성언어로 글쓰기, 고대 동굴벽화처럼 그리기보다는 흔적 남기기, 시각중심주의 인식 체계 이전에 발화되는 촉각적 글쓰기의 탐구라는 점에서 고래언어의 받아쓰기에 비견된다. 이는 문명적 인간임을 버리고 자연친화적이고 동물친화적인 인간의 원형으로 회귀할 것을, 또는 인격동일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공생체로 부활할 것을 촉구하는 홍이현숙 에코페미니즘 예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조은지의 ‘흙의 엑소도스’

“나는 이 세상에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단순한 이유로 자연스럽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은 나에게 생존에 관련된 일이다”라고 말하는 조은지. 그는 초월적 가치나 이념적 본질보다는 사회적 가치와 현실적 경험을 긍정하는 실존적 페미니스트로서 문명과 함께 가속화된 생태계의 파괴, 자본과 지식으로 그 파괴를 영속화 시키는 후기산업사회의 역기능을 통감하며, 시적이고 서사적인 작품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그는 가부장제와 자연 파괴를 직결시키며 인간/남성중심적 가치관으로 피폐해진 지구, 자연, 흙, 땅, 생물, 생명의 재생을 꿈꾸는 한편, 피억압자, 피식민자,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할 것을 목표한다. 이렇듯 강력하고도 예민한 주제의식을 비선언적이고 은밀하고 환상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그는 오히려 자신 작품의 정치적, 미학적 수위를 끌어올린다.
엔트로피 남용으로 인한 지구적 재앙에 대한 작가의 예술적 개입은 개발 이데올로기에 의해 타자화된 흙을 구하는, 한마디로 흙의 ‘엑소더스(Exodus)’로 진행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작업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흙으로 돌아가기, 흙에서 다시 태어나기, 흙으로 살기’라는 지구인의 지상명령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며 생태예술의 청사진을 그려낸다. 2006년 작가는 ‘흙의 엑소도스’의 시발점이 된 2개의 작품을 발표한다. 경기도 안산 외국인 근로자 마을에서 담아온 먼지를 전시장으로 가져와 전시함으로써 국경을 넘을 수 없는 불법체류자를 위한 상징적 탈출을 시도한 작품 < 작품명 ? >과, 신도시가 들어설 파주 지역의 진흙을 양동이에 담아와 전시장의 하얀 벽에 던지는 행위로 부동산 개발의 현장으로부터 흙을 탈출시킨 <신도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다>가 그것이다. 후자의 작품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제목 뿐 아니라 전시장소가 여성사전시관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흙의 탈출과 여성의 해방을 유비시킨 에코페미니즘의 예시적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자본화된 땅으로부터 흙을 해방시키는 생존의 엑소도스는 2008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진흙시_엑소더스>(영문 제목?) 에서 본격화되었다. 여기서는 육면체로 변신시킨 흙덩이를 손으로 한줌씩 뜯어내며 전시장 벽면에 던지는 일탈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근대적 개발 이데올로기에 억압당한 흙의 저항을 노래했다. 작가가 의도했던 아니건 간에, 밖의 흙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여 ‘화이트큐브’를 더럽히는 훼손행위는 모더니즘 전시 관행을 벗어나는 탈모더니즘 진술인 동시에, 손으로 빚은 흙 입방체를 투척, 파손시키는 신체 행위 역시 부계적 미니멀리즘 미학을 위배하는 페미니즘 발언으로 독해된다. 결국 그의 엑소도스는 피폐해진 자연 생태계뿐 아니라 남성중심적 화단의 생태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중층적 의미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반의 뉘앙스로 가득한 작가의 엑소도스 여정은 퍼포먼스 비디오 <흙도둑(Earth Thief)>(2009)으로 이어졌다. 분단선을 없어졌지만 다른 형태로 진행중인 분단의 상황을 의식하며 그는 냉전과 분단의 상징이자 어쩌면 모든 경계의 표상인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따라 성지를 순례하듯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걸어가며 명상적 퍼포먼스를 수행했다. 길고 긴 경계선을 따라 걸으며 비닐 봉지에 흙을 주워 담고 그것을 구멍난 봉지 밑으로 흘려버리는 반복적 수련 행위에 의해 흙이 이동되고, 이동하는 흙선을 따라 경계가 지워지는 동시에 다시 그려진다. 그가 흙도둑이라면 그것은 흙을 이동시키며 영역을 재구성하기 위한 ‘리매핑’ 행위, 정치 이데올로기로부터 땅과 흙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감행된 엑소도스 행위에 다름아니었다. 흙을 담고 흘리는 물리적 신체 행위를 통해 동서 분단의 경계를 흐리는 그의 추상적 지도그리기는 결국 남북 분단의 해소를 위한 밑그림이었을 터이다.
흙의 엑소도스는 2011년과 2012년 한국과 독일에서 개인전으로 발표한 <땅, 흙이 말했다>( 영문제목?)에서 본격화되었다. 무대위에서 진흙 덩어리를 벽면에 투척하는 행위와 벽을 치는 땅소리로 땅의 고통을 대변한 극적 퍼포먼스, 이 퍼포먼스를 더욱 비장하게 만든 것은 동시기 극심한 폭우로 일어났던 우면산 산사태 사건이었다. 작가는 재앙의 원인이 무차별 개발이라는 첨예한 문제의식에서, 동시에 땅을 피해자가 아닌 문명과 인간의 가해자로 간주한 결과론적 정황에 분노하며 이제 땅의 옹호자가 되기 위하여 ‘말하는 흙’이 되기로 했다. 벽면을 치는 ‘땅땅땅’ 소리로 땅을 부르는 진흙덩이의 울부짖음, 작가의 저항적 몸짓이 내뱉는 가쁜 숨소리,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하는 배우의 음성, 이에 공명하는 음악 연주가 ‘최후의 합창가’를 부르는 흙의 엑소더스를 연출한 것이다.
작가는 한국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과 삶의 경험을 작품에 녹여냄으로써 예술적 호소력을 배가한다. <떨어지는 계란>( 영문제목? 2016)은 세월호 희생자를 계란처럼 낙하하는 흙덩이로 암시하며 흙과 생명, 흙과 몸, 흙과 삶의 관계를 시사한 몸과 흙의 퍼포먼스였다. 10명의 퍼포머들이 흙을 떨어뜨리는 퍼포먼스를 통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가라앉는 것’에 대한 표현을 드러내며 흙과 삶은 한 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생태학적 관점을 강조했다. 안산시 선감도에서 박보나와 협업으로 진행한 <부동산박스빈선감도123 프로젝트RealEstateBoxEmptySeongamIsland123 project>(2010)는 선감도 레지던시 경기창작센터에서의 거주 경험을 배경으로 한 뮤직 비디오이다. 안산과 경기창작센터 주변을 연결해주는 123번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임대와 매매 간판을 부친 박스형 단층 통유리 건물들이 텅빈 채 방치되어 있는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 농어촌의 근대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속속히 들어서는 유령 같은 빈집들이 만드는 기이하고 불편한 섬풍경을 바라보며 애잔한 심정을 노래한 ‘소프트터치’의 흙의 찬가였다.
흙의 엑소더스는 인간예외주의, 자본주의의 또다른 희생양인 동물의 엑소더스로 이행된다. 2018년 <봄을 위한 목욕>( 영문제목?)은 작가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한 농장에서 치뤄진 소 목욕 제식에 참여해 손수 물호스와 브러시로 소의 외피를 닦는 장면을 담은 싱글채널 비디오다. 살떨리는 긴장감과 경외심으로 동물 몸을 씻기는 작가의 경건한 모습에서 인류를 대신해 비인간적 폭력을 사죄하는 씻김굿, 또는 고해성사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조은지는 이미 2004~2005년 일산 일대 개농장에 갇힌 식용 개들을 연민하며,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누듯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백만 송이 장미’를 불렀다. 실제로 동물과 거리를 없애고 관계맺기를 시도한 섬세하고 부드러운 치유적 <개농장 콘서트>( 영문제목?)로 동물권 옹호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작가의 동물과의 연대 의식은 2018~2020년 사이 진행한 심해생물 문어를 대상화한 문어 연작에서도 명시된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권역에서는 먹물을 뿌리는 문어를 글을 가진 물고기라하여 글월 문(文)을 써서 문어라 불렀다고 한다. 작가는 문어를 통해 “인간이 중심이 된 편협한 이데올로기를 뒤흔들어야 할 새로운 존재 양태의 언어 출현에 대해 상상”하며, 2018년 먹물로 책장의 글씨를 지우는, 즉 문어의 언어로 인간의 언어를 지우는 수행적 드로잉 퍼포먼스 <문어어문 文魚魚文>( 영문제목?) 발표했다. 같은 해 태평양지대 친구들로부터 음악을 받아 편집한 사운드 퍼포먼스 <문어의 노래> 영문제목?에 이어 2019년에는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그 아이의 문어 형제가 하나씩 생긴다는 인도네시아의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문어적 황홀경>( 영문제목?)을 제작했다. 여기서 작가는 언어 이전의 인간의 능력을 상상하며 인도네시아의 한 해변가에서 요가와 명상, 변성 의식 등을 담은 환상적 퍼포먼스를 영상화했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서 원격으로 제작한 <나의 쌍둥이 Octo-8을 위한 노래> (영문제목?)는 인간과 “가장 다르게 진화한 문어를 쌍둥이로 인식하고 소통을 실험한” 비디오로 여기서는 감정을 순화시키는 음악적 요소가 특히 부각되었다.
조은지는 흙, 동물에 이어 인간의 엑소더스를 위한 역사적 공모 작업을 수행했다. 2017년 아트스페이스 풀의 개인전 「열, 풍」은 제목이 시사하듯, 따듯한 체온과 힘의 에너지로 소수자를 부활, 재생시킨다는 의미로 기획되었다. 2채널 영상 <수행하는 사람들>((영문제목?)은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발발한 학살과 1970년대 캄보디아 킬링필드라고 불린, 캄보디아 대학살 사건의 생존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영상으로 기록한 2채널 비디오이다. 죽음의 극한상황을 이겨낸 생존자, 역사의 증인들은 여성합창단 ‘디알리타’(영문?)를 결성하여 당시의 억압적 상황을 아름다운 서사로 노래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동시에 후대에게 역사의 진상을 알리고 있다. 그들의 표정, 손짓, 혹은 눈물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내야 했던 순간들을 대신 말해준다. 작가는 피억압자, 소수자, 사회적 하위주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음성을 상실한 자들에게 음성을 되돌려주고자 한다. 따뜻한 체온(열)과 에너지(풍)로 그들을 부활시킨 이 작업에서 타자의 해방을 통한 여성 해방이라는 생태학적 비전이 강조된다.
지구상의 환경문제, 인간의 모순을 주제화한 작품? 전시제목? <두 지구 사이에서 춤추기>(영문제목?) (대안공간 루프, 2020)에는 동일한 원형 형태의 두 개의 지구가 등장한다. 두 개의 원이 만드는 경계는 서로 확장하며 서로의 교차점을 구현한다. 하나는 재개발을 앞둔 예지동 식당에서 버린 스테인리스 식기로 만든 설치 작업 <밥상 명상>>(영문제목?) (2018)에서 선보인 스테인리스 수저와 밥그릇, 국그릇, 주전자를 가지고 만든 원형 패턴의 구조물이다. 다른 하나는 생물들의 털 이미지와 작가가 배양한 심바이오틱 셀로 만든 지구 <작품제목있나요? 영문은? > 이다. 조은지는 유리병에 스코비라는 종균 원액, 설탕과 홍차를 넣고 어두운 곳에 보관하여 세칭 콤푸차를 만들었다. 박테리아와 효모균이라는 두 개의 다른 생명체가 발효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다중 세포 물질이 되었다. 스코비와 함께, 식물, 육지동물, 인간, 박테리아, 해양동물의 털 이미지를 프린트하여 원형을 만든다. 공생의 방식으로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 실험 결과가 지구의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하나의 지구와 또 하나의 지구, 두 지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민경의 퍼포먼스로 작가는 하나의 종과 또 하나의 종의 관계는 더 이상 냉전관계가 아닌 함께 공생하는 혼종의 관계라는 점을 역설한다.

생태주의 페미니즘의 실천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모두 사회 전반에 걸친 불안전성과 불확실성을 목도하고 있다. 그런만큼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기 위하여 자연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탐구하는 일이 중대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환경과학과 사회과학, 생태담론과 사회운동의 학제간 논의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생태정치학 또는 정치생태학은 과거의 비정치적 생태학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자연 환경에 미치는 직간접 영향을 진단하고 경제성장중심적 발전 패러다임에 의문을 던지는 한편, 전지구적 환경문제에 대한 정부와 국제 기구의 권위적 접근의 오류를 분석, 그에 대응할 윤리적 해법을 찾고자 한다. 생태 변화는 정치적 산물이라는 믿음 하에 경제 성장, 사회 안정, 환경 보전이 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점에서 생태정치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정치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추동되는 생태주의 담론에 여성의 문제를 교차시키고 있는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방식과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하고 방식이 유사하기 때문에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을 통해 이성중심적이고 발전중심적인 가부장제를 전복,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이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생태정치학을 수용하고, 생태학이 페미니즘 정치학을 포함하는 이유이다. 자연과 생명체에 대한 존경심에 근간하는 홍이현숙과 조은지의 작업은 생태주의 페미니즘을 가시화하는 시각예술이자 그것을 실천하는 정치미술로서 시의성을 갖는다. 특히 두 작가의 작가진술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자연, 인간, 동물은 누구나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없으며 다른 종들과의 상호의존성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이들의 동물주의 신념은 많은 부분 도나 해러웨이의 ‘심포이에시스 (sympoiesis)’ 개념과 맞닿아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이들은 서로 다른 종들이 함께 만들고, 함께 살고, 함께 한다는 해러웨이의 상호구성적 ‘반려종’ 사유에 공감하듯, 동물 되어보기, 타자와 한몸되기와 같은 공존동생적 비전으로 인류와 지구의 파멸을 막을 지속가능한 공생체적 신인류를 꿈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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