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낯선’ 그 여자의 방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에 의하면 남성 안에는 여성성이 원초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성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미술사를 돌아보더라도 글로리아 스타이넘의『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의 이야기처럼 남성들에게는 이제 갓 보송보송한 수염과 여드름이 돋아나는 사춘기 소년이 금남의 지역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동경과 무지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 우리의 현장미술에서 봇물처럼 터지듯이 여성 작가들이 시시콜콜하게 드러내는 그들 자신의 속내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남성들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타자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조: ‘아들과 딸에게는 어머니이고 한 남자에게는 아내...’인데 작년에 <대안공간 풀>에서 머리를 삭발하고 전시에 대해 설명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는 저에게 생생한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렇게 전시를 통해 담론의 장을 펴는 것을 뵈니 아주 고무적이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홍: 삭발이 그렇게 충격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실 잘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작업들은 집안에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일종의 다큐멘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외로 아줌마들은 일상 속에서 그런 일들을 흔하게 경험하곤 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아줌마들은 수시로 자기 팔을 칼로 긋는 등 자해행위나 일탈행위들을 저지르기도 하고 스스로 불면증, 우울증 등 병적인 상태에 빠져들어 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줌마들이 곧잘, 빈번히 일상의 한계점의 극을 반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일상의 지겨움과 심심함의 잔인함이 어떻게 소리 없이 사람들을 극한 상태로 몰고 가는지, 소외된 일상이 어떻게 난폭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저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조: 이번 전시도 지난 전시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방을 노출시켜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TV 한 대의 설치 오브제와 몇 대의 영상이미지로 지난 전시 보다 깔끔하게 정돈된 그녀의 방을 보여 주지만 전시를 볼수록 그녀의 미묘하고 복합적인 심리적인 지형도 안으로 빨려들어 가게 됩니다.

홍: 이 비니루방은 제가 사는 집의 심리적 공간을 전시장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의 공간은 거실인데 은색 빗금이 있는 회색 비니루 장판이 깔려 있습니다. 안쪽 공간은 안방인데 바닥은 장지를 모방한 노란색 비니루 장판이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 작업 속에서 되도록이면 바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도록 촬영하고 또 설치하였는데,...아줌마와 고양이는 공통적으로 둘 다 바닥을 박박 기며 일상의 칼날을 견딥니다. 바닥에 보이는 빗금들은 고양이의 손발톱자국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참아내는 아줌마의 손발톱 자국으로도 보이지 않나요.

조: 지난 전시에서 실내복을 입고 TV를 보며 큼지막한 엉덩이로 ‘느릿느릿한 몸’으로 운동하는 영상 속의 그녀의 모습은 선인장과 냉장고, 욕조 통 등의 오브제들과 오버랩 되어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몸뚱이가 비대해져 더 이상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비대한 중년 여성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물론 삭발한 머리카락에 물을 주는 영상이미지에서 전시는 다른 의미를 띠고 있지만...그런데 <몸의 기록01>에서 비니루 방을 걸레질하는 그녀의 큼지막한 엉덩이와 <몸의 기록08>에서 손으로 하는 영상이미지들은 그러한 감성들을 다시 떠오르게 합니다.

홍: 저 역시도 안정과 불안정, 안주와 일탈의 경계에 떠 있는 아줌마의 위치에 관한 질문입니다. 안쪽 공간의, 움직이는 엉덩이는 사각의 카메라 중앙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끝없이 카메라 바깥쪽을 헤매고 있는 것이라든가. 또는 엉덩이가 입고 있는 빨간 꽃무늬는....한순간에 바람 빠져 쪼그라들 것 같은, 그러나 여전히 기대 만빵으로 부풀어 있는 욕망의 서슬 푸름에 관한 송가입니다. 이 ‘몸의 기록01’ 작업 맞은 쪽 유리문 바깥에는 ‘몸의 기록 08’을 설치하였는데 어두운 문 저편에서 여성의 신체의 일부인 손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보이도록 한 것도 그것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조: 지난 전시에서 오브제들이나 영상물에서 보듯이 소소한 가정의 일상의 일들이나 신체의 모습들을 통해 중년 여성의 삶의 모습을 바깥의 시선에서 투영시키고 있다면, 이번 작업의 TV 오브제나, <비니루 방>에서 보여 지는 관조적인 영상이미지는 그녀의 타자화된 내면의 시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특히 <아침 여덟시 사십오분>에서 열려진 베란다 창문 사이로 비추는 아침 햇살이나 또는 가족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바라보는 TV 오브제는 가정에서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관계 속에 놓인 여성의 존재가치와 가족구성원에 대한 존재의 물음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홍: 거실쪽 모서리에 놓인 모니터의 작업은 <아침 여덟시 사십오분>이라는 제목인데 동향이고 아파트 일 층인 우리 집에 유일하게 햇살이 깊숙이 들어왔다 나가는 시간입니다. 그 오분의 시간 동안 고양이와 아줌마는 아주 좋아해서 같이 해바라기를 하곤 합니다. 그 시간에 듬뿍 햇살을 받으며 똥을 싸는 고양이의 행복한 모습은 일상의 늪에 깊이 빠져 느긋해져 있는 아줌마의 모습과 별차 없어 보입니다. 아줌마가 몸담고 있는 이 일상의 늪은 아주 교묘해서 어떤 땐 욕조의 따뜻한 물처럼 가슴까지 차올라서 나를 감싸주지만 어떤 땐 그 많은 물이 무수히 많은 칼날이 되어 나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가족구성원으로서의 나는 매우 헌신적이고 희생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롭히게 됩니다.

조: 저는 정서가 메말라서인지 아니면 게을러서 인지 개나 고양이라든가 애완동물들을 잘 키우질 못합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하여 제 주변의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것을 보니 비슷한 것 같더라 구요. 반면에 제가 알고 있는 여성들은 애완동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마치 애를 하나 키우는 것 같다는 둥. 그래서인지 <비니루 방>에 고양이가 비니루 장판 위에서 비니루 봉지를 가지고 노는 장면들을 담은 영상이미지를 보았을 때 그런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더라구요. 그리고 혼자 놀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은 일종의 그녀의 자화상과 같이 보이기도 하고....

홍: 사실 저 역시 제가 고양이를 키울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애가 자기에게는 꼭 애완동물이 필요하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바람에 제가 못 이겼지요. 처음에는 고양이와 서로 많이 낯설어 했지만 차츰 익숙해지게 되었고 한 식구가 되었고 이제는 서로의 기분을 서로에게 이입시킬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는 사이가 되었지요.

조: 제가 사는 집 앞에 조그만 슈퍼마켓은 물건을 사면 그때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주더라구요. 그렇기에 비니루는 대개 대량 생산적이고 일회적인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오브제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비니루 방>>을 이번 전시의 주제로 정하였는데.....

그렇습니다. 이번 전시의 중심 컨셉인 비니루는 시각적인 표현도 중요했지만 그 의미에 있겠지요. 저는 이번 전시에서 그 의미를 다른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소리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안방에서 엉덩이가 바닥을 쓱쓱 문지르는 소리가 낮게 저음으로 깔리고 거실 쪽에서는 고양이가 비니루 봉지를 가지고 노는 소리가 하이톤으로 전시 공간 전체를 잡아주게 설치하였습니다. 그것은 비니루의 얇고 파삭한 느낌의 가벼운 소리가 전반적인 우리의 비루한 삶과 부박한 일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조: 전시장에 놓여 있는 TV 오브제는 실시간으로 방영되는 것을 틀어 놓았더라 구요. 그래서 인지 실제로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거의 하루 종일 TV를 틀어놓고 계세요. 실상 그것은 저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줌마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저의 어머니는 노인네라 그런지 드라마를 보고도 현실 속의 인물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TV 광고는 드라마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TV 광고가 현실과 유리되어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TV 오브제나, 전시되지 않았지만 홍보로 사용된 <약속>이라는 작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홍: 사실 TV는 그 내용보다는, 한쪽에서 늘 웅웅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즉 미디어가 일상에서 차지하는 심리적 위치에 관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원래 이 작품은 TV속의 광고내용을 패러디해서 만들었었는데 나중에 전시장에서 바꾸게 되었습니다. 전시에서의 TV는 시각적으로 매우 실용적인 설치였습니다. 안방 공간에서의 ‘몸의 기록’ 작품들과 거실에서의 고양이와 베란다작품은 안과 밖 두 개 씩의 작품이 1:1로 팽팽하게 작동하여 양분된 그런 구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실 쪽에서, TV가 제 3의 점에 놓이게 되면서 또 다른 시각적 축을 구축하게 된 것이지요. 아줌마의 현실과 잠들지 않는 심리적인 욕망의 대칭점으로서 말이죠.

조: 저를 비롯한 남성들에게 여성의 타자적인 시간, 특히 중년 여성의 타자적인 시간을 조금이나마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