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니루 방에 은닉된 에너지 : 홍현숙전
(관훈갤러리, 2006. 12. 6 - 12. 19)

조선령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아트 인 컬쳐 2007년 2월호



“세상에는 축구를 보는 인간과 보지 않는 인간, 두 가지가 있다”라는 식의 ‘단순무식 이분법’ 놀이로부터 글을 시작해보면, 작품을 읽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호와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와 내러티브가 ‘실패’하는 지점으로부터 읽는 것이다. 홍현숙과 같은 작가의 경우, 전자의 방식으로 작업을 읽는 것은 적게 말해서 상투적이고 많이 말한다면 앙상하다고 생각한다.
재작년 대안공간 풀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부터 작가는 ‘유목적인’ 큰 공간의 설치작업으로부터 일상의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관심을 옮긴 것처럼 보인다. 아파트 공간의 실내에 갇힌 단조로운 카메라는 지하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에 달린 폐쇄회로 카메라처럼, 굴러가는 비닐봉지와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의 등짝을 무심하게, 약간은 코믹하게, 그러나 결국에는 냉정하게 비춘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차갑고 네모난 프레임과, 둥글게 굴러다니는 피사체들의 움직임 사이에는 유머러스하지만 날카로운 충돌이 발생한다. '갇힌 방 - 사각형 - 움직이지 않음 - 카메라' vs '방 안을 굴러다니는 몸/고양이/비닐봉지 - 원형 - 움직임 - 카메라의 피사체'라고 하는 기호쌍이 추출될 수 있겠지만, 이 기호 쌍들은 이분법적 가치체계 속에 쉽게 가두기 어려운 것들이다.
고양이는 비닐봉지에서 나오려고 하는 걸까, 더 들어가려고 하는 걸까? 고양이는 스스로 비닐 속으로 뛰어 들어 갔으면서 동시에 거기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쳇말로 ‘빼도 박고 못하는’ 상황처럼 보인지만, 실은 이 애매하고 양가적인, 심지어 자해적인 움직임은 가둠/갇힘, 억압/저항이라는 내러티브의 차원을 넘어서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굴러다니는 비닐봉지의 움직임에는 목적도 기승전결도 없고 의미도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은밀하게 파열적인 힘을 갖는다. 영상이 만드는 사각의 프레임과 대조되는 이 둥근 원형의 움직임에는 작가가 과거 <은닉된 에너지>라는 제목으로 보여줬던 켜켜이 쌓인 층의 두께가 또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 ‘비니루 방’이라는 제목은 양파껍질 같은 이 층의 성격과 어울린다. 그것은 걸레로 닦고 또 닦아서 반들반들하게 만든 ‘비니루 장판 방’이면서, 그 위를 굴러다니는 ‘비니루 봉지’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 ‘비니루 봉지’는 고양이에게 또 다시 하나의 ‘방’이다. 무엇을 가두는 방이기도 하지만 가두어졌기 때문에 굴러다닐 수 있는 방. ‘빼도 박도 못하는’ 이 상황은, 오히려, “뺄 건지 박을 건지 결정해라”라는 명령에서 벗어난 어떤 역설적인 지점을 만들어낸다. 기호나 내러티브의 ‘실패’ 지점. 그러나 성공적인 실패의 지점.
비니루 장판을 둥근 공처럼 왔다갔다 하는 ‘물체’ - 자세히 보면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의 등짝’이다 - 도 비니루 방 속의 고양이와 비슷한 운동을 한다. 자세히 관찰해야 바닥을 닦는 여성의 몸이라는 것을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등짝’에는 개성이나 정체성이 없다. 하지만 몸은 가장 구체적인 개인의 영역 아닌가? 그것은 비니루 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지만, 또한 자유의지로 그 위를 유연하게 날아다니는 몸이기도 하다. 이 몸의 움직임은 하나의 기호이기도 하면서(아무리 개인적인 움직임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기호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어떤 가치론적인 내러티브의 완결성을 방해하는 ‘기호 아닌 것들’이기도 하다. 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아파트 베란다를 비추고 있는 또 하나의 작은 모니터 영상은 클로즈업된 이 영상들을 하나의 풍경으로 객관화시킨다. 그래서 모니터의 영상은 본편을 해설하는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에도 어떤 직설적인 언급은 없다. 자세히 보면 재작년 개인전에 등장했던 커다란 선인장이 평온한 아파트의 아침에 다소 폭력적인 이미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평온 속의 긴장은 비니루 방위의 둥근 운동들이 갖는 ‘은닉된 에너지’를 좀 더 첨예하게 드러내준다.
하고 싶은 말에 집중하면서도 단정적인 의미부여를 삼가 하는 이러한 방식이 형식에 대한 적절한 통제력과 맞물려 작업을 풍부하게, 또한 완성도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지만, 한편으로 작가의 캐리어에 비해서는 약간 소품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작은 세계를 다루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상의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떤 거창한 공간보다 더욱 더 현기증 나는 깊이를 감추고 있기도 할 것이다. 좀 더 깊은, 안으로부터의 포스를 발산하는 작업으로 가는 어떤 중간단계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