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숙 아홉 번째 개인전 <비니루방>

임정희 (연세대 겸임교수/ 미학·미술평론)



두껍고 · 다르게· 살펴보면 ···

홍현숙의 아홉 번째 개인전, “비니루방”이 12월 6일부터 19일까지 두 주일간 관훈갤러리 에서 관람자들을 만난다. ‘은닉된 에너지’를 주제로 한 시리즈 작업들(1999년까지 여섯 번의 개인전), 인사동 육교 설치프로젝트(2000), 통일전망대 설치프로젝트(2002) 등 개인전 작품들과 ‘COEX국제도서전(2004)’, ‘신도시전(2003,2004)’ ‘소풍 프로젝트(2002)’ 등의 그룹전 작품들이 대부분 야외에 대규모로 설치되면서 외형적이고 객관적인 묘사에 치중했던 데 반해, 2005년의 “풀과 털” 개인전에 이어 이번 2006년 개인전, “비니루방”은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면서 자기 성찰적이고 감정이입적인 작업으로 변화하였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자리잡은 지층과 그 표면을 감싸주는 옷들과 지표면을 뚫고 자라난 보리싹들, 펼쳐진 청바지들로 출렁이는 도심 바다, 육중하고 근엄한 통일전망대 건물과 낡고 오래된 육교를 부드럽게 싸안은 호랑이천 피부.. 등 이전 야외작업들은 작가 개인의 혼합된 기억과 체험에 자극된 것이라 할지라도 문화 일반의 규범적 기대들, 혹은 제도화된 연대 책임을 벗어나지 않은 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전체적이며 구조적인 관심을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이번 “비니루방” 작업들은 단절과 중층성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하여 고립되어 있는 듯한 개인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를 미세한 씨줄과 날실로 엮어내고 있다. 작가의 관심이 ‘구조’에서 ‘관계’로 전환된 것은 이미 “풀과 털” 전시 부터였다. 그러나 “풀과 털”에서는 개별화된 문화적 고립과 이분법적 대립이 전면적인 물화의 형태로 나타나 즉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데 반해, “비니루방”에 와서는 물화된 가치를 의도적으로 절하, 절상, 왜곡시킴으로써 관계와 더불어 ‘전략’이 두드러지고 있다. 박탈당한 자의 무력감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본능적인 에토스를 차용함으로써 작가의 메시지에 진정성의 아우라를 부여하였던 “풀과 털”에 비해, 전략이 구사된 “비니루방”의 작업은 한결 미적으로 정교하고, 관람자가 해석을 통해 참여할 기회를 개방함으로써 작가와 관람자의 거리는 좁아들 수 있게 되었다.

“비니루방” 작업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공간과 시간을 보여준다. TV는 켜진 채 거실 구석에서 저 혼자 웅웅 대고, 고양이는 아침햇살이 거실에 가장 길게 들어오는 시간, ‘아침 여덟시 사십오분’에 회색 비닐 장판 바닥에서 비닐봉지를 가지고 만족하게 놀고 있으며, 빨간 꽃무늬 옷을 걸친 아줌마 엉덩이는 안방의 금색 비닐 장판 바닥을 문질러대며 움직이고 있고, 손은 다른 신체 부위와 분리된 채 공중에 둥둥 떠서 손가락을 움직여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에서 고양이와 작가 자신의 행위, 실제 공중파를 연결해 놓은 TV모니터는 경험적 삶과 실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곳/집 안은 기술적인 체계를 통해 저 곳/전시장으로 확장된 것이고, 이 곳/전시장은 상징적 체계를 통하여 저 곳/ 집안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외형적으로는 동일할 수 있는 전시공간은 관람자의 입장에 따라, 의미의 층위에 따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상징적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세계를 경험하는 사회적 수단이 되고 사회적 신체가 된다.
작가는 드러나는 미술작업과 드러나지 않는 허드레 가사일, 또는 이미 사회적 관계망에서 포착되는 행위와 그 사회적 관계망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아직은 사회적 관계로 포착되지 않는 행위, 혹은 생산적 과정과 재생산 과정을 서로 매개하는 장소로서 전시장을, 그리고 매개하는 기능으로서 미술작업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홍현숙에게 있어 미술작업이란 자신의 몸이 동물적 신체나 개별적 신체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적이고 상징적인 체계들을 통하여 사회적 신체로서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가 되고 있음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진화의 비전이 없다면 파편적 일상에서 능동적 존재를 파악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여성으로서 작가의 몸은 고양이와 달리 몸의 존재를 일부만 드러내는데, 이는 남성의 응시 아래 놓여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심리적인 물신숭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전략으로 보여진다. 홍현숙은 작가 자신이나 다른 여성의 몸을 작품의 재료로 삼아 변형을 가하거나 작품의 주제로 활용함으로써 반성적이고 자율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꾸준히 여성의 몸을 진지하게 다루어왔다. 미술에서는 여성의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매우 다양하게 시도되어왔다. 그러나 “남성이 성적 흥분을 위해 여성을 이용하는 것과, 그것이 얼마나 모욕적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여성이 여성을 이용하는 방식을 분리하는 것은 매우 포착하기 어렵다.”(From the Centre, 1977)는 루시 리파드Lucy Lippard의 지적처럼, 남성들이 만들어 온 여성 몸의 의미를 벗어나 여성 자신을 위해 여성 자신의 몸을 되찾으려는 어떤 시도도 홍현숙의 전략처럼 늘 모험적이다. 우리 문화 안에 존재하는 성차에 대한 근본적인 불균형, 여성 몸으로 표현되는 관습적인 성의 역학관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여성주의적 미술작업은 실제 제약을 만나 수없이 많은 개인의 ‘전략’들을 내놓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이야말로 고립된 작가가 사회적 규범의 운용을 통해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사회를 재조직하는지, 그리고 실제로는 전혀 고립되어 있지 않음을 이야기해 준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하여 자신이 ‘몸으로 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을 테이프에 기록하였다. 흔히 ‘눈’은 세계를 응시하는 인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몸’은 특별한 특징과 버릇들이 행동과 몸짓으로 각인되어 있는 저장장소로 사용된다. 홍현숙의 작업에서는 눈이나 몸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전도되기도 하면서 분리되지 않고 중층적으로 결합하여 몸에 관한 문제들을 또 다른 문화적 관점에서 펼쳐 놓는다.
안방 바닥에서 움직이는 빨간 꽃무늬의 아줌마 엉덩이(‘몸의 기록01’)는 사각의 카메라 중앙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끝없이 카메라 바깥 쪽을 헤매고 있어, 엉덩이-몸의 육감적인 차원과는 달리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불안정한 아줌마의 위상을 매우 모순적인 메시지로 전달한다. 이 때 카메라는 안방이나 거실이나 바닥이 많이 보이도록 위치를 잡고 있고(‘몸의 기록01’,‘비니루방’), 프로젝터는 바닥을 크게 보여주기 위하여 4000안시(ANSI lumens)의 것을 두 개를 사용하고 있어, 작가가 본 것이 외형적·객관적 사실로 얇게 묘사되기 보다는, 관람자들이 ‘바닥’이라는 두꺼운 의미의 층위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혹은 능동적으로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로 제공된다.
또한 ‘몸의 기록01’ 작업의 맞은 쪽 유리문 바깥에 ‘몸의 기록08’이 설치되었는데, 이 때 유리문 위에는 mirror film을 입혀 문 뒤의 모든 빛을 차단한 뒤 그 앞에 모니터를 설치함으로써 어두운 문 저편에 손이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손이 행하는 기록의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손이 놓인 맥락을 다르게 제공함으로써 분리된 응시를 거두고 오히려 기록의 관행에 대한 의심을 강하게 유발시킨다.
결국 “비니루방”의 비디오 작업들은 작가의 카메라(응시)가 자신의 피사체에 대해 객관적 기록을 할 수 있다는 가부장적 개념을 넘어서서, 기록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관람자 개인에 따라, 관람자들 집단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편차를 가능하게 하여 관람자들이 미디어(몸)에 대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비니루방’이 은유하는 삶의 부박함에 갇힌 채 통상 수동적 존재로 파악되는 작가 자신과 세계를 행위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미적 실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미적 실험이 사회적 관행과는 다른 관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